엘런머스크는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하는가

이 글은 미국의 유명 블로그인 Wait But Why에 실린 엘런머스크에 관한 네 편의 글 중 “Post 4: About Elon’s secret sauce—the way he thinks“를 번역한 것입니다. (Thanks to Niannuh, Hankyung Ryu)

홍수 지질학자 vs 일반 지질학자

1681년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버넷이 <지구신성론(Sacred Theory of the Earth)>를 써서 출간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6000년 전의 지구는 폭신한 표면과 축축한 내부를 가진 완벽한 구체였는데, 노아의 대홍수가 일어나 내부의 물이 방출되고, 이것이 마르는 과정에서 지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지구는 더 이상 완벽한 구체의 형태를 띄지 않게 되었다. 대격변으로 말미암아 지표가 일그러져, 위로는 산과 산맥이, 아래로는 동굴이 생성되었으며, 홍수에 희생된 생물들은 화석이라는 형태로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짠! 하고 버넷은 이 모든 것을 밝혀냈다. 성경에는 지구가 6000살일 것으로 암시되어 있었다. 그러니 지구의 나이가 훨씬 오래되었음을 시사하는 물증은 당대 신학의 오랜 난제였다. 그것을 버넷이 해결한 것이다. 요즘말로 치자면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사이의 딜레마를 초끈 이론이라는 틀로 한 지붕 아래에 통합한 셈이랄까.

버넷 이후 오늘날까지도 성경 구절들과 지질학을 조화시키기 위한 숱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15,000 단어 분량의 <홍수 지질학(Flood Geology)>란 제목의 위키피디아 항목에서 잘 다뤄지고 있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일군의 사상가들이 이 난제에 덤벼들기 시작했다. 바로 과학자들이다.

“지구는 6000년 전에 만들어 졌고, 대홍수가 분명 어느 한 시점에는 일어났었다.” 이것은 지질학을 연구하던 당시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변치 않는 게임의 룰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이 전제에서 벗어나는 법이 결코 없었다. 반면 과학자들은 어떠한 룰도 미리 상정하지 않은 채 게임에 임했다. 그들에게 이 문제는 모든 종류의 관측 자료와 측량자가 허용되는 빈 서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이후 300년 동안,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이론들을 생산해 냈다. 새로운 기술의 탄생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측량 방법들이 탄생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이론들은 새로운 이론들로 대체되었다. 과학자들은 자꾸만 길어지는 지구의 나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1907년, 지질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의 과학자 버트람 볼트우드가, 방사성 연대측정법을 통해 광석의 나이를 해독해내는 기술을 발견한 것이다.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지구의 역사를 10억년 단위로 늘려 놓았으며, 이는 곧 대륙이동설과 판 구조론이 발전하는 데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과학자들의 확실한 승리였다.

홍수론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과학자들의 결론은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게임의 룰을 깨면서 임했기 때문이다. 지구가 공식적으로 6000살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룰 아닌가? 이와 다른 결과를 보여준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따라서 결함이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과학적 증거들이 점점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자, 점점 더 많은 홍수론자들은 백기를 들고 과학자들의 관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만고불변이라 여기던 그 전제가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른다 고백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여전히 완고했다. 이들에게 한 번 정해진 룰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룰이었고, 이는 사람들이 무얼 믿느냐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게 다 음모고 거짓말이란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홍수론자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타당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최근(2003년)에는 톰 베일이라는 작가가 <그랜드 캐년: 또다른 관점(Grand Canyon: A Different View)>이란 책을 펴냈다.

알려진 바와 달리, 방사성 연대측정법은 그랜드 캐년의 암석들이 수백만년에 걸쳐 형성된 것임을 입증하지 못했고, 사실 그랜드 캐년의 퇴적층 중 대부분은, 에덴 동산에서의 원죄를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킨 대규모 홍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만약 지질학자 유형 통계를 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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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waitbutwhy.com 독자)들의 대다수는 데이터, 증거, 정확성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포스팅을 하는 중 실수를 할 때마다 나는 이 사실을 떠올린다.

지구의 나이, 인류란 종의 역사, 번개가 치는 이유 등 우주에서 벌어지는 물리현상에 대한 답을 구할 때 우리는 믿음이나 종교보다는 데이터와 논리가 훨씬 효과적인 도구임을 인정한다.

이런 것들을 모두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의 불편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방식, 의사 결정 방식, 삶의 방식에 있어서 사실 우리는 과학자들보다는 홍수론자들 편에 더 가깝다.”

그럼 엘론 머스크의 비밀은 뭐냐고? 그는 뼛속까지 과학자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엘론 머스크의 괴짜 같은 화법에서 우리는 그의 사고 방식에 관한 첫 번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인간 아이:

“난 어둠이 무서워. 온갖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도 어둠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

엘론 머스크:

“어릴 적 저는 어둠을 정말 무서워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어둠이란 그저 파장 길이가 400에서 700 나노미터 사이인 광자가 결여된 상태임을 알게 됐죠. 그러고서는 광자의 결여 상태를 무서워하는 건 참 바보같은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닿았고, 그 이후론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혹은,

인간 아버지:

“애들이 자라나고 있으니 일을 좀 줄여야겠다.”

엘론 머스크:

“세 쌍둥이의 의식 점점 발달하고 있어서 이젠 거의 2인분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일을 좀 줄여야 할듯요.”

혹은,

인간 싱글:

“애인 만들고 싶다. 데이트할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빠선 안되겠지.”

엘론 머스크:

“데이트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우선 애인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시간을 좀 더 여퉈두어야 하겠지. 5에서 10시간 정도? 일주일에 얼마 정도 시간이 필요하려나? 아마 10시간? 그정도가 최소려나? 모르겠다.”

나는 이걸 “머스크어(MuskSpeak)”라 부른다. 머스크어는 일상 생활의 세세한 모든 부분까지 있는 그대로, 실제 그러한 대로 기술하는 언어이다.

특히 머스크어는 일반적인 인간 언어에 비해 기술적 문제에 봉착한 상황에서 문제를 규명하는 데에 큰 효과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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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론 머스크를 더 유별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머스크어로 사고한다는 데에 있다. 죽음이 두렵냐는 질문에 그는, 아이가 생기니 죽음에 대해 더 편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아이는, 적어도 하드웨어 차원에선 절반의 나라고 할 수 있고, 내가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의 총량만큼 아이들은 소프트웨어 차원에서도 나를 닮는다”고 설명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는 좀 작고 모자라고 귀여운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엘론 머스크에게 그의 다섯 아들들은 다섯 대의 최애 컴퓨터로 보인다. 그는 당신을 컴퓨터 보듯 할 것이고, 거울에 비친 자신 마저도 한 대의 컴퓨터를 보듯 할 것이다. 이는 그가 단순히 ‘사람 = 컴퓨터’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사람은 ‘컴퓨터인 누군가’인 것이다.

사람을 컴퓨터로 보는 그의 관점은 어떤 면에서 틀리지만은 않다. 가장 원시적 수준의 정의상 컴퓨터는 데이터를 보관하고 처리하는 기계인데, 이것은 우리의 신체 상 뇌의 역할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인간 정신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썩 낭만적인 방법은 아닐지라도, 이 부분이야말로 머스크어가 효과를 나타내는 지점이다. 뇌를 컴퓨터로 보는 이 관점은, 우리가 종종 잊곤 하는, 우리 자신의 하드웨어적 측면과 소프트웨어적 측면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컴퓨터에서 하드웨어는 “기계, 배선, 그리고 기타 물리적 부품들”로 정의된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어서 하드웨어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신체기관으로서의 뇌와, 지능과 재능, 타고난 강점과 결점을 규정하는 뇌의 물리적 역량인 것이다.

컴퓨터에서 소프트웨어는 “컴퓨터에 의해 사용되는 작동 정보와 프로그램”으로 정의된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내가 아는 것, 내가 생각하는 방식, 그러니까 신념 체계, 사고 패턴, 추론 방법 등이 바로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것이다. 삶이란 감관을 통해 뇌로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데이터 홍수이며, 소프트웨어는 유입된 데이터들을 평가하고 걸러내고 처리하고 정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이로부터 결과물, 즉 의사결정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하드웨어는 태어나는 순간 주어지는 진흙 덩어리이다. 물론 모든 진흙 덩어리들의 크기가 같지는 않다. 각각의 진흙 덩어리들, 즉 뇌는 고유한 강점과 결점의 조합을 가진 채 주어진다.

그러나 그 진흙 덩어리가 어떤 용도로 쓰이게 될지를 규정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이다.

엘론 머스크가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지 궁금해하며 사람들이 집중하는 부분은 그의 하드웨어적인 측면이다. 물론 엘론 머스크는 훌륭한 스펙의 하드웨어를 갖고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를 포함해 스티브 잡스, 아인슈타인, 헨리 포드, 징기스 칸, 마리 퀴리, 존 레논, 아인 랜드, 루이스 C.K. 등과 같은 특출난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면 갈 수록 드는 확신이 하나 있다면, 그들을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소프트웨어에 대해 얘기해보자. 우선 엘론 머스크의 소프트웨어부터. 이 포스트에 앞서 3개의 포스트를 쓰면서 나는 엘론 머스크로부터 배우게 된 모든 것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가 한 말, 그가 내린 결정, 그가 착수한 프로젝트와 그 접근 방법들을 ’그’라는 소프트웨어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로서 이해했다.

그리고 그 단서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엘론 머스크의 소프트웨어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엘론 머스크의 소프트웨어

머스크의 소프트웨어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원해요 박스”라는 것과 함께 구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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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해요 박스에는 상황 A를 상황 B로 바꾸고자 하는 시점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상황 A가 당신이 현재 처한 상황이라면, 현재 상황이 상황 B로 대체 되도록 당신이 하길 원하는 것이 원해요 박스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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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해요 박스는 항상 “현실 박스”와 짝을 이룬다. 현실 박스에는 현재 시점에서 실현 가능한 모든 경우와 상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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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들이댄다.

원해요 박스와 현실 박스가 겹쳐지는 영역이 “목표 풀”이다. 여기에는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여러 목표물들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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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목표 풀에서 목표물을 선택한다. 이 목표물을 현재 당신이 처한 A로부터 B로 옮기게 될 것이다.

변화란 것은 어떻게 실현될까? 자신의 역량을 선택한 목표에 집중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은 시간, 신체적-물리적 에너지, 자원, 설득력, 네트워크 등의 다양한 형태의 역량을 가진다.

‘고용’이란 개념은 사람 A가 자신의 자원(돈)을 이용해 사람 B로 하여금 그의 에너지를 A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에 쓰도록 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책 한 권을 공적인 자리에서 소개를 한다면, 그것은 오프라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와 공적 신뢰도를 이용해 그 책을 수 천 명의 사람에게 알려준다는 목표를 성취하고자 함이다.

목표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어느 방향으로 역량을 쏟을 것인지가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역량 투입 방식에 대해 생각해볼 단계, 즉 전략 구상의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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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단순한가? 당신이 생각했던 그림이랑 딱히 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론 머스크 소프트웨어가 효과적인 이유는 이 도식 자체에 있지 않고, 이 도식을 과학자의 방식으로 이용한다는 데에 있다. “과학이란 정보와 지식의 총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형태의 사고 방식이다.”라고 칼 세이건이 얘기한 바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엘론 머스크가 이 사고 방식을 어떻게 적용시키는지 두 핵심 경로를 통해 알 수 있다.

1) 그는 ‘무’로부터 직접 소프트웨어를 설계한다.

엘론 머스크는 이를 “제 1 원리로부터 추론하기(First Principle Thinking)”라 부른다. 다음은 그의 설명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의 사고 과정이 이전의 경험이나 관습에 너무 얽매여있다. 무엇인가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생각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항상 이렇게 해왔던 거니 우리도 이렇게 해야지.”라고들 말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이렇게 한 적이 없으니 분명 좋은 방법이 아닐 거야.”라고 말한다. 바보 같은 일이다. 무엇인가를 추론할 때는 항상 그 근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 1 원리”는 물리학의 용어이다. 문제의 근본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추론을 쌓아 올리는 것, 이렇게 도출된 결론이 타당한지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과학의 언어로 말해보면, 참임이 증명된 증거로부터 시작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자는 “지구는 평평해. 왜냐면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야. 직관적이고, 모두가 그렇다고들 동의하잖아.”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육안으로 확인하는 지구는 지구의 일부이며, 일부만을 본 경우에 평평해 보이는 다른 모든 사물과 같이 지구의 일부 역시 평평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 지구의 전체 형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만한 정보가 부족하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말은 세워볼 만한 가설이지만 우리가 이 가설을 확인하고 증명할 도구와 기술을 갖추기 전까지 결론을 확정 지을 순 없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참이라고 밝혀진 증거들(제 1 원리)만을 수집하여 그것을 합리적 결론을 구성하기 위한 퍼즐 조각들로 이용한다.

일상의 모든 상황에서 제 1원리에서부터 추론하기를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엘론 머스크는 과연 이 일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뇌라는 소프트웨어는 크게 4개의 의사결정 과정을 가진다.

  1. 원해요 박스 채우기
  2. 현실 박스 채우기
  3. 목표 풀에서 목표 정하기
  4. 전략을 구성하기

각각의 단계에서 엘론 머스크는 ‘제 1원리에서부터 추론하기’의 원칙을 지킨다. 원해요 박스 채우기 단계에서의 제 1원리에서부터 추론하기란, 사려 깊고 정직하고 주체적인 자기 이해를 의미한다. 현실 박스 채우기 단계에서는 자신의 능력과 현실 세계의 상황 모두 대한 아주 명료한 그림을 떠올림을 의미한다. 목표 풀에서 목표 정하기 단계에서는 개별 목표들을 합리적으로 견줘볼 기준과 도구들의 구비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략 구상하기의 단계에서는 자신이 이전까지 해왔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논리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새로운 정보가 유입됨에 따라 각각의 단계에서 도출된 결론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모두들 중학교 수학 시간에 ‘증명’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전제1: A=B
전제2: B=C+D
결론: A=C+D

수학은 언제나 딱딱 맞아 떨어진다. 전제들이 옳다면 결론은 항상 옳다.

100% 참인 전제들을 수학에서는 공리라 부르며, 공리들로부터 100% 참인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는 일을 ‘증명’이라 부른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공리와 증명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반박되기 전까지 보편 타당한 증명이라 여겨졌었다. 아인슈타인은 뉴튼이 ‘지구의 평평함’을 말하는 사람들처럼 자연현상의 일부만을 가지고 성급한 일반화를 내렸음을 이야기했고, 일반 상대성 이론이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보다 타당한 법칙임을 이야기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타당성을 유지하는 반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보편 타당한 증명’이냐고? 일반 상대성 이론이 초미시의 차원에선 적용되지 않는 법칙이라는 것이 양자 역학에 의해 밝혀지면서 또다른 법칙들이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과학에선 자명한 공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것도 100% 분명한 것으로서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렇게 느껴지는 것들도 어느 한 순간에 틀렸음이 입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차드 파인만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 있다. “과학적 지식은 각기 다른 정도의 확실성을 가진 여러 진술들의 총체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없으며, 다만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진술들과 상대적으로 확실한 진술들만 있을 뿐이다.” 과학은 대신 ‘이론’이란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론들은 물증들에 근거해 참임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새로운 정보들에 의해 언제나 개선되거나 그릇됨이 입증될 여지를 가진다.

그리하여 과학에선 다음의 꼴을 가진다.

(현재로서의) 전제: A=B
(현재로서의) 전제2: B=C+D
(현재로서의) 결론: A=C+D

삶에서 오로지 참인 공리는 “나는 존재한다.”이며, 이 외의 모든 것들은 확실치 않다. 실제의 삶에 적용할 과학적 이론을 구성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삶은 측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대강 때려 맞추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과학에서 ‘때려 맞춤’은 ‘가설’이라 불린다.

(나로선 맞다고 여겨지는) 전제: A=B
(나로선 맞다고 여겨지는) 전제2: B=C+D
(나로선 맞다고 여겨지는) 결론: A=C+D

가설은 기본적으로 검증되기 위해 세워진다. 가설을 검증하는 일은 그 가설을 폐기할 수도, 혹은 더 탄탄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친 가설은 비로소 ‘이론’이 된다.

하여 각 과정으로부터 제 1원리로부터 출발해 결론을 도출한 엘론 머스크의 다음 걸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혹독한 검증의 시간이다. 이 단계에서 엘론 머스크는 새로 유입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미 도출된 결론들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제1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1) 원해요 박스를 채우고, 2) 현실 박스도 채우고, 3) 목표 풀에서 목표도 선택하였으며, 4) 목표 성취를 위한 전략도 구성하였다. 당신은 제1원리로부터 추론하기의 원칙을, 어디에 당신의 역량을 집중할 것인지 어떻게 그 역량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목표 성취를 위해 우리가 내놓은 전략은 일종의 ‘가설’이다. 가설은 검증되어야 하며, 그 검증은 한 가지 방식만으로 가능하다. 바로 ‘실험’이다. 당신은 고안해 낸 전략에 에너지를 쏟으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본다. 외부로부터 새로운 정보들이 새로 유입된다. 이 데이터들을 통해 우리의 전략은 더 탄탄해질 수도, 더 약해질 수도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기존의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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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략 루프가 반복되면 될수록 목표 성취에 있어서의 효율성은 점점 높아지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일들도 벌어진다.

특정한 시점에서의 원해요 박스는 끊임 없이 변하는 당신의 욕구를 찍어놓은 스틸샷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원해요 박스를 채우고 있는 내용들 역시 하나의 ‘가설’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 내가 원하지 않던 것이었고, 내가 딱히 원하지 않던 것인 줄로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간절히 원하던 것임을 깨닫는 일은 일상에서 흔히 벌어진다. 우리의 내면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니 어느 한 시점에 원해요 박스에 있던 게 시간이 지나면서 박스 안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원해요 박스는 바로 지금의 당신의 내면에 가장 충실해야 하므로, 성찰을 통해 원해요 박스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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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전하는 원해요 루프를 진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실 박스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실현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의 가설이며, 이 가설에선 현실적인 상황과 당신의 능력 모두 고려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능력은 변하고 성장하며, 세상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 2005년에 가능했던 일과 오늘날 가능한 일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최신 업데이트된 현실 박스를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메리트이다.

제1원리로부터 추론하기 원칙을 지켜가며 현실 박스를 채워 넣는 일은 힘든 일이다. 이 현실 박스를 실제 현실과 매치시키는 일은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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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식에서, 각 박스는 현재 시점에 세워둔 가설을 의미하며 각 동그라미는 가설을 수정하는 데에 사용될 새로운 정보들의 원천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박스가 아니라 동그라미가 ‘갑’임을 주지해야 한다. 박스는 동그라미가 뿌듯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저 동그라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잊게 되는 순간 박스 안의 정보들은 실효성을 잃을 것이며 더 이상 의사 결정 수단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된다.

한발짝 물러서서 소프트웨어 전체를 조망해보자. 아랫편은 목표 설정 메커니즘, 윗편은 목표 달성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목표 달성에 있어서는 레이저 초점이 필요하다.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줌을 당겨 그 목표에 초점을 모으고 전략 루프를 돌려가며 될때까지 들이 받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원해요 박스와 현실 박스의 내용물은 변하고 박스의 형태 역시 변한다. 이는 목표 풀의 변화를 의미한다.

목표 풀은 원해요 박스와 현실 박스가 겹쳐지는 영역에 불과하다. 즉 목표 풀의 형태와 내용은 전적으로 원해요 박스와 현실 박스에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목표 성취를 위한 노력이 아래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목표 풀과 일치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걸 빨간 화살표로 표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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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하단의 동그라미들은 우리에게 당장 몰두하고 있는 미시적 과업들로부터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당신이 쫓던 목표가 더 이상 목표 풀 속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원해요 박스와 현실 박스가 변했다면, 거시적 차원의 인생 변화의 시점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별, 이직, 전근, 우선순위 변경, 태도 변화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엘론 머스크의 삶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말로만 설명한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엘론 머스크의 소프트웨어가 써 내려간 엘론 머스크의 이야기

들어가며

첫 째 단계로 엘론 머스크는 자신의 원해요 박스를 채워 넣었다. 제1원리부터 시작해 원해요 박스를 채워 넣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여기엔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중요함과 사소함,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며, 당신의 내면적 자아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경멸하는지, 무엇에 사로잡히는지, 따분함을 느끼는지 숙고가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에 명료하게 답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엘론 머스크는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독립적인 숙고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어떻게 진로를 설정할 것인지에 관한 본인의 초창기 시절 사고 과정에 대해 엘론 머스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인류라는 종의 번영에 관심이 많음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즉, 그의 원해요 박스의 중심에는 이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물어보았고, 여기에 대한 그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제게 미래란 것은, 갈래갈래로 펼쳐지고 있는 가능성의 흐름들입니다. 어떻게 좋은 흐름에 올라탈 것이냐,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밝은 미래를 보장해줄 선택지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날을 내다볼 때에 “암울하군”,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겠는걸” 같은 말이 떠오르지 않도록 말이죠.

그래서 물어봤다. 아인슈타인이나 리처드 파인먼, 스티븐 호킹같은 물리학자들을 예로 들며, 엔지니어 대신 과학자가 되는 것은 고려해 본적이 없는지.

저 역시 위대한 과학자들의 위대한 발견들에 감탄해 마지않습니다만, 그들의 발견은 기본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발견입니다. 이미 굴러가고 있는 우주에 대한, 이미 우주가 담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랄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지식을 인간의 맥락으로 끌어오는 일입니다. 정원사와 꽃의 관계와 같은 겁니다. 정원이 없으면 꽃도 없죠. 저 스스로가 꽃이 될 수도 겠지만 그 전에 정원이 있어야 꽃도 있을 수 있으므로 정원사가 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미래에도 리차드 파인만 같은 사람이 많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요컨대, A와 B 모두 좋다. 하지만 A가 없으면 B는 불가능하다. 고로 A를 선택한다는 대답이었다.  그는 이어서:

물리학을 공부하는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물리학을 학부 때 전공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물리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데이터입니다. 물리학이란 학문은 근본적으로 공학과 기술의 발달에 의해 좌지우지 됩니다. “공학자가 먼저냐, 과학자가 먼저냐”하는 논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 공학자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공학 없이는 데이터도 없거든요. 공학없이 물리학의 모든 연구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한정된 데이터 속에서도 특출난 성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데이터를 모을 방법이 없다면 연구는 더 이상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갈릴레오를 보세요. 그가 직접 고안해 낸 망원경 기술을 통해 그는 목성에도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말하자면 공학은 과학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한계를 설정하는 요인인 겁니다. 문명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한계 요인, 즉 공학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A와 B 모두 좋다. 하지만 A가 발전하지 않으면 B 역시 발전할 수 없다. 고로 A를 선택한다.

인류에 공헌하기 위해서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엘론 머스크는 대학 강연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인류의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은 무엇일까?”라는 제 1 원리 물음으로부터 고민을 시작한 그는 다음 다섯 항목으로 이루어진 리스트를 만들었다. “인터넷, 지속 가능한 에너지, 우주 탐험, 인공지능, 인간 유전자 코드 재배열”

그에게 중헌 것이 뭣인지 듣다 보면, 그의 원해요 박스가 어떻게 채워져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원해요 박스엔 인류 발전에 공헌하기 외에 한 가지 항목이 더 있다.

세상을 바꾸고 미래에 영향을 미칠, 입이 쩍 벌어져 ‘저게 말이 돼? 미친 거 아냐?’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쩌는 신기술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엘론 머스크는 최첨단 신기술,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흥분에 매료되어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걸 모두 고려했을 때, 머스크로서 가장 이상적인 길은 최첨단 기술과 공학이 관련된, 인류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원해요 박스 안에 놓인 이 포괄적이며 기본적인 방향자만으로도 목표 풀은 확연히 명료해진다.

십대 시절 그는 돈도, 명예도, 인맥도, 기술도, 지식도 없는 아이였다. 다시 말해 그의 현실 박스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여 그는 다른 젊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했다. 그는 초기 목표를 원해요 박스로부터 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현실 박스를 확장하고 박스 안의 “실현 가능한 것”의 목록을 늘리는 데에 두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미국에 머물길 원했고, 공학에 대해서도 더 많은 지식을 쌓길 원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그는 스탠포드 대학의 고밀도 에너지 커패시터 연구 박사 과정에 지원했다. 기존 배터리의 에너지 저장 효율을 극복하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는 과정이었다.

인터넷으로의 유턴

목표 풀에서 스탠포드 대학 박사 과정을 선택한 머스크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95년 당시엔, 갓 상용화된 인터넷이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분야는 머스크로선 돈과 명성 없이도 뛰어들 수 있었던 분야였다. 하여 머스크는 자신의 현실 박스 안에 인터넷과 관련된 여러 경우의 수를 추가했다. 초창기의 인터넷에선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인터넷 산업에 숟가락 얹기는 금새 그의 원해요 박스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재빠른 재조정은 그의 목표 풀에 큰 변화를 몰고왔다. 스탠포드 대학에서의 박사 과정이 더 이상 그의 목표 풀의 중심자리에서 벗어났다.

대다수의 사람들이었다면 스탠포드 박사 과정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이미 남들에게 말도 해둔 상태라 그만 두기도 뭐할 것이고, 다른 대학도 아닌 스탠포드 대학 아닌가? 그러니 그만 두지 않는 편이 더 일반적이고, 안전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저 인터넷 광풍이 신기루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35살에 해오던 사업을 말아먹어 돈도 다 날렸는데 학위가 없어서 재취업도 안 되는 상황이 오면 어떡할 것인가?

머스크는 이틀 만에 박사 과정을 그만 두기로 한다. 그라는 소프트웨어에서 거시차원의 성찰 기능이 작동했고, 막 에너지가 흘러 들어갈 참이었던 어떤 목표가 더 이상 목표 풀에 존재하지 않음이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신뢰했으므로 거시적인 진로 변화를 모색했다.

그는 동생과 Zip2 사업을 시작했다. Yellow Pages와 Google Maps의 중간쯤 되는 컨셉의 사업이었다. 4년 후 그들은 회사를 매각하였고 엘론 머스크는 2200만 달러(약 250억)를 손에 넣는다.

닷컴 백만장자로서 택할 수 있는 쉬운 길은 평생을 갑부로 살면서 다른 기업에 투자를 하거나 사람들의 돈으로 다른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머스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원해요 박스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야심찬 스타트업 아이디어들로 가득했으며, 현실 박스는 그의 수중에 있는 2200만 달러와 이 돈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들로 넘쳐났다. 한가롭게 부업이나 하는 일은 그의 원해요 박스에도 현실 박스에도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1999년 풀서비스 온라인 금융기관을 만들 심산으로 그는 수중에 있던 자본금을 가지고 X.com 사업을 시작한다. 인터넷의 역사는 아직 짧았고 온라인 은행에 돈을 쌓아둔다는 아이디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머스크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 짓 하지 말란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머스크는 남의 얘기보다는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신뢰했다. 인터넷에 대해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은 그가 구상하고 있는 계획이 현실 박스 안의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터넷이 훨씬 큰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전부였다. 그의 소프트웨어의 상층부, 즉 전략-실천-결과-조정의 반복루프가 작동함에 따라 X.com의 서비스, 운영팀, 운영 목적, 심지어 이름조차 바뀌어갔다. eBay에 회사가 매각된 2002년 기준, 회사는 PayPal이란 이름의 송금 서비스 회사였고, PayPal의 매각으로 머스크는 1억8천만 달러를 벌었다.

머스크, 우주로

31살에 무지막지한 갑부가 된 머스크는 다음엔 뭘 할지 고민에 빠졌다. “뭘 하든 돈 잃을 일은 하지 말라”는 통념도 통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엘론 머스크는 “인터넷 기업을 만드는 것 말곤 해본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이 30에 전적으로 생소한 분야에 뛰어드는 일은 분명 무모한 일이었다. “인터넷 가이의 길을 선택했던 건 바로 너야.”

하지만 엘론 머스크는 제1원리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원해요 박스를 다시 들여다 보며 생각했다. 인터넷은 더 이상 박스 안에 있지 않았다. 박스 안에는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엘론 머스크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영위하기 위한 우주 여행 기술의 발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선 엘론 머스크는 자신의 현실 박스를 들여다보며 항공우주 산업에 다리를 걸치게 됐을 경우 마주하게 될 한계 상황에 대해 따져보기 시작했다.

머릿속 통념은 그에게 당장 멈추라고 소릴 질러댔다. 엘론 머스크는 이 방면에 관련한 제도권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로켓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소프트웨어는 그에게 “제도권 교육이란 무언가를 알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중 가장 느린 방법”임을 일러주었다. 곧바로 머스크는 독서를 시작했고, 사람들을 만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머릿속 통념은 어떠한 사업가들도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한 적이 없고, 실패 가능성이 다분한 일에 돈을 쏟아 부어선 안 된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머스크의 철학은 달랐다. “어떤 것들은,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승산이 없더라도 해야만 한다.”

머릿속 통념은 로켓 개발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소요되고, 여태까지 아무도 스스로가 상상했던 것만큼 싼 로켓을 만든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구는 평평하며 그 나이는 6000살이라 주장하던 자들을 무시하고 연구에 매진하던 과학자들처럼, 머스크는 직접 계산을 시작했다.

여태까지 모든 로켓은 비쌌다. 그러므로 미래에도 로켓은 비쌀 것이다.”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로켓은 기본적으로 알루미늄, 티타늄, 구리, 탄소 섬유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걸 다 분해해 놓은 후 원자재 단가가 얼마냐 묻는다고 쳐봅시다. 당신한테 마법봉이 있어서 이걸 휘두르기만 하면 원자재 재배열에 드는 비용이 아예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에 로켓의 값은 얼마일까요? 놀랄 만큼 작습니다. 기존에 로켓을 만들 때 드는 비용의 2%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결국엔 원자재 재배열 방식에 그 모든 돈이 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어떻게 이 원자재들을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재배열할 것인가 입니다. 토요일마다 몇 개의 미팅을 가지는데요, 참여하는 사람 중에는 큰 항공우주기업 출신도 있고 해서, 이 회의에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물이 있는지 점검해 봤습니다. 근데 보니까 장애물이라고 할 만한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SpaceX 사업을 시작한 거에요.

역사, 통념, 주변 사람들 모두 한 가지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소프트웨어와 제1원리로부터 추론하는 그의 습관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남들보다 자신을 신뢰한 그는 자신의 돈으로 SpaceX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우주 여행에 드는 비용을 낮춰 인류가 다행성 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테슬라를 넘어서

2년 후 SpaceX 사업을 발전시키던 중, 한 친구가 머스크에게 AC Propulsion이란 회사를 소개했다. 이 회사는 초고속, 장거리 전기 자동차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한 회사였고, 엘론은 여기에 크게 감응했다. 머스크의 현실 박스는 전기자동차 기술이 시기상조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가 리튬이온 베터리의 발전수준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AC Propulsion는 그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였고, 곧 “일류 전기자동차 사업 시작하기”는 그의 현실 박스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로켓 개발 비용을 계산했을 때처럼 그는 베터리 개발 비용을 따져보았다. 장거리 전기 자동차의 상용화를 위해서는 베터리 제조 비용부터 손봐야 했다. 계산기를 들고 제1원리부터 따지기 시작한 그는, 베터리 제조 비용 중 대부분이 원자재가 아니라 중간업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한 번 통념이 틀렸음을 증명한 그는, 미래엔 지금보다 훨씬 더 저렴한 베터리가 가능함을 깨달았다. 하여 그는 전기자동차의 전지구적 상용화를 목표로 테슬라를 공동창업하였다. 우선 회사에 자원과 자본을 쏟아 부은 후,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시작했으며, 결국엔 CEO가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2년 후 머스크는 사촌들과 함께, 수 백만 가정에 걸쳐 태양 전지 인프라를 보급함으로써 에너지 혁명을 이룬다는 것을 목표로 SolarCity를 창업하였다. 이미 거의 한계치에 다다른 시간과 에너지 외에,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다른 자원을 목표 풀의 다른 목표들에 쏟아 부었다.

최근 머스크는 도시 간 교통수단이라는 또 다른 분야에 새로 뛰어들었다. 튜브를 이용해 순식간에 수백 마일의 거리를 이동하는 교통수단이 가능하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을 Hyperloop이라 명명했다. 이 프로젝트에 한해서, 그는 그 자신의 시간, 에너지, 자원을 직접 쏟아 붓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최초 아이디어를 백서(Whitepaper) 형태로 공개한 후, 여기에 엔지니어들이 혁신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게끔 일종의 대회를 열었다.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와 설득력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온갖 종류의 회사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질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머스크는 인간을 한 대의 컴퓨터로 보고, 그 자신의 뇌 소프트웨어 역시 그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제품으로 여긴다. 뇌 소프트웨어를 디자인하는 회사가 아직까진 없으므로, 그는 자신의 뇌 소프트웨어를 직접 디자인하며 끊임없이 테스트하고 업데이트한다. 그의 업무 효율, 빠른 학습능력, 영리하고 명료한 전략과 미래 구상, 업계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 모두 이 점에 기인한다.

머스크의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켓 공학이 필요한 건 아니다. 모든 것은 상식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생애 전체가 당신 머릿속 소프트웨어에 의해 굴러가는 것이라면 최적화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란 소프트웨어에 관심은 커녕, 이것이 어떻게,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왜일까?

대다수 사람들의 소프트웨어

생애 발달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새로 태어난 뇌는 말랑말랑한 찰흙과 같아서, 이것의 일차적인 임무는 태어났을 당시의 주변환경에 재빨리 적응하고 그 환경 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적화된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꾸는 데에 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찰흙은 굳어가서 그 형태를 바꾸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나의 할머니는 나만큼이나 오랜 시간 컴퓨터를 사용했지만, 컴퓨터를 다룰 때의 할머니의 표정은 아직까지도 유리테이블 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발을 허우적거리는 거북이를 연상시킨다. 내게 컴퓨터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인 반면, 할머니에게 컴퓨터는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가치관, 지각능력, 신념 체계, 추론 기술 등으로 이루어진 ‘뇌’는 어린 시절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학습하는 것일까?

모두들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랄 테지만,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의 과정을 거친다.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안전하고 위험한지, 어떤 사람을 본받아야 하는지 배운다. 하지만 이 가르침들은 ”나는 어른이고 너보다 당연히 더 많이 아니까 나랑 논쟁할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내 말에 따라야 한다.”의 방식을 가진다. 당연히 아이들로서는 “왜요?”를 물을 수밖에 없다.

아이의 호기심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앎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지배하는 법칙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고자 한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명령하고 그것을 그저 따르길 요구하는 것은, 예컨대 이미 완성된 소프트웨어 하나를 아이의 머릿속에 인스톨하는 일과 같다. 아이가 “왜?”냐고 묻고 묻고 또 묻는 이유는 그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알고자 그것을 분해하려는 시도이다. 즉, 제1원리까지 파고 들어가, 어른들이 시킨 그 일에 실제로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저울질을 하는 행위이다.

아이들이 처음 “왜?”를 묻기 시작할 때 부모들은 귀엽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많은 부모들과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를 결국 끊어낸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라는 말로, 아이들의 지적 해체 현장에는 더 이상의 “왜요?”가 관통할 수 없는 시멘트 바닥이 들어선다. “제 1원리를 알고 싶어? 옛다, 이제 더 이상의 ‘왜’는 필요 없어. 이제 빨랑 신발 똑바로 신어.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 일이 과학의 세계에서 벌어지면 어찌될지 떠올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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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노릇이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할 일들은 여전히 쌓여있는데, 똥오줌도 못 가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부모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줄로만 아는 저 조그만 악마를 또 먹여 살려야만 한다. 기분도 꿀꿀한 바쁜 날이면, “왜?”라는 아이의 질문은 그 자체로 악몽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악몽은 견뎌낼 가치가 있는 악몽이다. 논리적 구성이 불분명한 명령과 가르침들은 아이에게 낚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생선 몇 마리를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던져진 생선만을 먹으며 자란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선을 얻는 방법을 알 수 없다.

학교라고 다를 건 없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인 세스 고딘(이 사람의 블로그는 제1원리 추론 노하우로 가득하다)은 TED 컨퍼런스에서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라 주장한 바 있다.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류의 생산성과 삶의 질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하지만 공장이 늘어나면서 공장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교육 시스템 역시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디자인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보편 공공 교육의 의의는 내일의 학자를 양성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학자는 이미 넘쳐나고 있었기에, 교육의 목표는 공장에서 일할 사람들을 기르는 데에 있었습니다. 즉 말 잘 듣고, 순응하고, 적응하게끔 사람을 훈련시키던 곳이었습니다. “우린 너흴 1년 동안 가공할 거야. 만약 너희에게서 하자가 나타나면, 잠시 보류해뒀다가 다시 가공할 거야.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처럼 너흴 일렬로 앉혀놓을 거야. 공장이 교체 가능한 부품들이 모여 만들어졌듯 너희 역시 언제든 누구로든 교체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 거야.”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가 제임스 클리어 역시 비슷한 얘기를 자신의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1960년대, 창의역량 연구가인 조지 랜드 박사가 1660명의 다섯 살짜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 중 98%는 “매우 창의적”을 기록했다. 랜드 박사는 같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5년 간격으로 같은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들이 10살이 됐을 때, “매우 창의적”을 기록한 아이들은 30%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15살 시기에 12%로 떨어졌고, 25살 시기에는 불과 2%만을 기록했다. 아이들은 성인으로 자라날 수록 자신의 창의성을 잃어갔다. 랜드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비창의적 행동양식을 학습”한 것이었다.

맞는 말 아닌가? 창의적 사고는 제1원리 추론의 가까운 친척이다. 두 경우에서 모두, 사고의 주체는 자기 자신만의 사고 회로를 개발한다. 창의성을 타고난 기질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것은 습관화된 사고 방식에 더 가깝다. 빈 캔버스를 생각으로 색칠하는 걸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이를 위해선 새로운 것을 상상해 내는데에 훈련 되어있는 뇌가 필요하다. 하지만 학교는 이와는 반대로 지도자를 따르기, 한 줄로 걷기, 시험 잘 치르는 법만 가르친다. 빈 캔버스 대신 색칠공부 책을 쥐어주고 선 밖으로 물감이 삐져 나오면 안 된다고만 가르친다.

우리의 뇌가 가장 팔팔한 바로 그 시기에 우리의 부모님과 선생님과 사회는 이미 정해진 모양의 틀에 우리의 뇌를 끼어 맞추고 짓누르고 있다.

자신만의 사고 방식도 못 갖추고 내면적 성찰도 못한 채 자라나, 우리는 부모에 의해, 선생님들에 의해 설치된 30년도 더 된 구식 소프트웨어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된다.

사실 운이 좋아야 30년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 두려움, 야망 모두를 주입시키려는 고압적인 부모 아래에서 당신이 자라왔다고 쳐보자. “우리가 제일 잘 아니까, 세상은 무서운 곳이니까, 우리가 말하는 게 가장 맞으니까, 너는 우리 말을 따라야 해.” 이 환경에서 자란 당신은 “엄마가 그랬어” 소프트웨어에 평생 지배 받는 삶을 살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현재 직장에 대해 “왜요?” 게임을 한다면 총 몇 번 “왜요?”를 묻게 될까? 아마 금새 “엄마가 그랬어”란 말이 귓전을 맴돌며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엄마는 그러는가?

바로 엄마의 엄마, 할머니가 그랬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왜 그러는가 하면 할머니의 엄마, 아빠가 그랬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엄마, 아빠는 왜 그러는가 하면 할머니의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가 그랬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19세기에서나 유효했을 삶의 교훈들을 오늘날까지도 뼈에 새겨 넣게 된다.

아직까지도 주위에 이런 사례가 차고 넘치는 이유는, 나를 포함한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대공황을 겪은 세대에 의해 길러진 세대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진로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면, 당신은 아마 아래의 그림이 설명하는 소프트웨어가 만들어낸 대답을 듣게 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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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에 태어난 한 사람이 2015년 현재까지 살아남았다고 치자. 그의 소프트웨어는 대공황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이고, 그가 딱히 자아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오늘날까지도 1930년대에 형성된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사고할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자녀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설치했고 그 자녀들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같은 소프트웨어를 설치했다면? 현재의 Y세대(1978년 이후 출생한 세대)는 자신이 대공황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야심 찬 기업가 정신, 예술적 도전 정신을 가지는 일을 두려워만 할 것이다.

이들은 구식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신식 컴퓨터, 즉 스스로의 깊은 성찰에 근거하지 않은, 현실 세계에 근거하지 않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급급하기만 한 가치관, 신념체계, 통념들만을 내면화한 사람들이다.

실재하는 증거들에 입각하지 않은 온갖 확신들!

도그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암기 따위로 뭔가를 알 수 있다 믿는 것 같은데, 이런 이해 과정 없이 만들어진 지식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 리차드 파인만

도그마는 어디에나 있고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 형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X는 참이야. 왜냐면 [권위자A]가 그렇게 말했거든. 여기서 [권위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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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원칙으로부터 추론하기”와는 달리 도그마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나 그의 주변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으며, 비판 받지도 수정되지도 않는다. 디버깅이 허용되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이미 인쇄되어버린 규정집과도 같은 것이다. 이 규정집에 담겨있는 규정들이 특정 조건과 상황 속에 놓인 한 개인의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것을 수용하고 이것이 말하는 대로 살아간다.

다른 누군가의 도그마에 순종하며 살기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많지 않다.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라는 언명은 “네 사고 능력은 몹시도 보잘것없으니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인생 망치기 싫으면.”이란 언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는 결국 자신만의 사고방식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사고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자신만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기 위한 모든 힘든 과정들, 그리고 그것들을 수정해가는 과정들을 경험할 수 없다. 이래가지고는 사고 초짜를 면할 길이 없다.

강력한 사고 스킬만이 고유한 생의 진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강력한 사고 스킬이 없으면 어느 순간이라도 도그마가 당신의 삶에 비집고 들어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삶을 살게 할 것이다. 도그마는 대체로 당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화가였다면 훨씬 행복했을 누군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변호사를 하고 있다거나, 변호사였다면 훨씬 즐거웠을 누군가가 아무것도 모른 채 화가를 하고 있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은, 진화하는 방법도 적응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뜻이다. 함께 자라왔던 도그마가 당신에게 썩 먹혀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사고 초짜들은, 이 거부를 통해 현재의 도그마로부터 다른 도그마로 갈아타는 결과에 머물고 만다. 애초에 자신만의 소프트웨어를 코딩할 줄 모르니, 또 다른 사람의 소프트웨어를 인스톨을 하는 셈이다.

도그마적 사고방식에 의해 지배 받는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독립적 사고를 시작하고자 하는 의도로 우리는 도그마를 거부한다. 하지만 도그마적 사고방식은 오래된 습관과 같아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최근 아이를 갖게 된 친구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그녀에게 했던 것보다 아이를 훨씬 더 자유롭게 키울 거라고 말했다가도, 바로 몇 분 뒤 이렇게 말한다. “음 아냐, 내 말은 그러니까, 애가 몬타나에 있는 어떤 농장에서 일하고 싶어해도 말리지 않을 거란 말이야. 우리 엄마 아빠였다면 절대 이런 말 못하겠지. 근데 만약 애가 헤지 펀드 회사에서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집에서 쫓아내버릴지도 몰라.”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이 물려준 경직된 도그마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난 게 아니다. 도그마의 브랜드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게 내가 말하는 도그마의 덫이다. 이 덫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나 이 도그마가 강력한 동맹군을 가진 경우엔 말할 것도 없다.

집단(Tribes)

“저는 어떤 것에 대해선 보수적이고 어떤 것에 대해선 진보적이에요. 하나의 관점으로만 모든 문제를 바라보려 하는 사람을 전 믿지 않습니다. 그 말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동일한 솔루션이 있다는 얘기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 루이 C.K.

세스 고딘 역시 도그마적 사고방식의 본질을 정확히 요약하는 말 한 마디를 한 바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걸 하길 기대해요. (People like us do stuff like this.)”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확실히 구분 지어야 할 것이 있다. 집단주의가 보통 부정적 뉘앙스를 띄고 있긴 하지만, 집단이란 개념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집단이란 그저 종교, 인종, 국적, 혈연, 명분 등의 공통의 관심사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도, 미국의 민주당도, 호주라는 국가도, 라디오헤드의 팬들도 각각 집단이라 불릴 수 있다. 아스날의 팬들 역시 집단이다. 뉴욕의 뮤지컬씬도 집단이다. 템플 대학도 집단이다. 이렇게 규모가 크고 헐렁한 집단이 있는가 하면 좀 더 작고 타이트한 하위집단도 있다. 당신과 당신의 친척들이 대가족이라는 집단으로 묶여있다면 당신의 직계 가족은 그 하위집단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인은 집단이고, 텍사스인들은 그 하위집단이며, 텍사스 아마릴로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하위-하위집단이라 할 수 있다.
집단주의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집단과 집단 구성원 사이의 관계에 있다.

집단과 집단 구성원이 개별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정체성이 일치한다면 이때 집단주의는 긍정적이다. 집단의 정체성과 한 사람의 정체성이 일치된다 여겨질 때 그 사람은 그 집단의 일원이 되기로 한다. 집단과 어느 집단 구성원의 정체성이 어느 한 시점부터 더 이상 일치되지 않게되면 그는 그 집단을 떠난다. 이걸 의식적 집단주의(conscious tribalism)라 부르자.

집단과 그 구성원이 하나의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때 집단주의는 부정적이다. 구성원의 정체성은 그 집단의 도그마가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집단의 정체성이 변한다면, 구성원의 정체성도 거기에 맞게 변한다. 구성원의 정체성은 독립적으로 변하지 않는데, 이것은 그 구성원 개인이 독립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걸 맹목적 집단주의라 부르자.

의식적 집단주의에서는 개별 구성원과 그의 정체성이 우선시된다. 그가 누구인지가 그가 속할  집단을 결정한다. 반면 맹목적 집단주의에서는 집단 자체가 우선시된다. 그가 누구인지는 그가 속해있는 집단에 의해 결정된다.

의식적, 맹목적 집단주의는 스펙트럼의 형태로 나타난다. 흑과 백이 아니다. 누군가가 튼튼한 사고 능력을 배우지 못한 채 자라났다면 그는 아마 튼튼하고 독립적인 자아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고, 따라서 맹목적 집단주의에 취약한 사람이 될 것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그들의 사회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선입견과는 다른 자신만의 정직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견해라는 것 자체를 표현할 능력이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종교, 국가, 정당과 같은 거대 집단의 경우 맹목-의식 스펙트럼 전체를 아우르는 구성원을 가진다. 하지만 어떤 집단의 경우, 특정한 유형의 추종자들만을 끌어들인다. 경직되어 있고 선명하고 교조적인 집단일 수록 맹목적인 구성원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높다. ISIS는 런던 철학 클럽보다 맹목적인 구성원을 가지게 될 확률이 훨씬 높다.

도그마적 집단이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건 충분히 납득가능 한데, 이들이 인간 본성의 핵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 상 커넥션과 연대를 갈망한다. 그리고 도그마는 개별자들을 모아 하나로 묶는 효과적인 접착제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적 안전감을 추구한다. 자신의 유별나고 독특한 성격 때문에 존재의 불안을 겪는 누군가에게 집단과 그 집단의 도그마는 생명줄과도 같을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견해와 가치들이 망라되어있는 원-스탑 샵처럼.

인간은 편안함과 안전과 확실함을 원한다. 맹목적 집단주의의 집단적 사유보다 확신이 자라나기 쉬운 곳은 없다. 데이터에 근거한 과학자의 이론은 그 과학자가 가진 증거만큼의 유효성을 가지며, 그 본질 상 변화의 여지를 허용한다. 하지만 한 집단의 도그마는, 데이터 없는 믿음에 근거한 실천이며 눈 먼 구성원들은 그것을 의심 없이 믿어버린다.

수학이 왜 증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과학이 왜 (실험을 통해 검증된) 이론을 다루는지는 이미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가설과 실증에 기반해야 한다. 하지만 맹목적 집단주의는 수학자와도 같은 자신감으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우리 집단이 그렇다고 말한) 전제1: A=B
(우리 집단이 그렇다고 말한) 전제2: B=D+C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내린) 결론: A=C+D

집단 내의 많은 구성원이 이런 식으로 결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면 나 자신의 확신도 강화된다.

확신 없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이 중 쉬운 방법은, 도그마적 집단 내부에서 정의된 정체성을 내면화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성원은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버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맹신적 집단주의가 구성원들의 구원자가 되는 방식이다.

문제는 집단의 경직된 도그마와 맹목적 집단주의 둘 모두, 자신을 의식적 집단주의를 가진 열린 사고의 주창자인 양 행세한다는 데에 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맹목적 집단주의에 다가가 있을 수도 있으며, 우리가 속해있는 그 집단들 역시 생각만큼 열려있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시험해보기 위해선 “우리” 팩터의 강도를 점검해보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지”의 줄임말인데, 아무튼 이 “우리”라는 말은 당신을 순식간에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우리”라는 말엔 묘한 쾌감이 있다. 이 느낌의 중심에는 내가 “우리”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인간이라면 언제나 갈구하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다. 헐거운 “우리”는 자각있고 독립적인 구성원들의 모임으로서의 “우리”이고 그래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맹목적 집단주의 안에서의 “우리”는 좀 무시무시하다. 맹목적 집단주의에서, 그 집단의 핵심 도그마는 그 구성원들의 실천에 의해 점점 비대해진다. 의식적인 집단의 구성원은 자기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특정 결론에 다다르지만, 맹목적 집단은 그 자체가 결론이다. 도그마의 장벽을 넘어서는 개인의 고유한 견해나 자질, 신념은 맹목적 “우리” 안에서 용납될 수 없다. 집단의 도그마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 개개인이 의지하고 있는 확실성과 집단적 정체성 모두에 도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맹목적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는 우리의 적, 즉 “그들”이다. 그 어떤 것도 집단적으로 혐오 받는 “그들”만큼 “우리”를 통일시켜주는 것은 없다. 그리고 맹목적 집단은 “그들” 집단의 도그마를 미워하는 만큼 더 맹목적이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더 꽁꽁 묶여있다.

한 가지 실험을 해볼 수 있다. 당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다른 집단원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이 “그들”에게로 넘어가고 있음을 넌지시 말해 보라.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다른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던져보라. 만약 당신이 Boulder의 아티스트라면 다음 번 디너 파티 때 지구온난화가 리버럴들의 헛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해보라. 만약 당신이 이라크인이라면 가족에게 이스라엘이 잘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해 보라. 만약 당신의 배우자가 완고한 공화당원이라면 당신이 요즘 오바마케어에 끌리고 있다고 얘기해보라. 만약 당신이 보스턴 출신이라면 친구들에게 요즘 양키스를 응원하고 있다고 얘기해 보라.

당신이 속해있는 집단이 자기확신에 가득 찬 맹목적 신념을 가진 집단이라면 겁에 질린 동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말은 그저 멍청한 헛소리가 아니라, 거의 신성모독쯤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들은 화를 낼지도 모르며, 어쩌면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 열변을 토해낼지도, 혹은 대화를 아예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열린 마음의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맹목적 집단주의의 신념과 너무 깊게 얽힌 나머지, 그들은 앞으로 당신을 예전처럼 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경직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도그마는, 인간관계의 측면에서도 그들이 인지하는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구 상 대다수의 대규모 분쟁은 맹목적 집단주의에 기인한다. 극단에 치달은 맹목적 집단주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 줌의 카리스마적 악당이 열정에 찬 웅변으로 순식간에 청중을 충성스런 군대로 만드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있어오지 않았는가. 대규모 잔혹 행위의 이면에는 항상 맹목적 집단주의가 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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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중 나치에 가입했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맹목-자각의 스펙트럼 위의 부정적인 극단에 속해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다른 한 쪽 극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대개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영역에 서 있다.

셰프와 요리사

엘론 머스크식의 사고방식과 대다수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차이점은 셰프와 요리사의 차이점과 비슷하다.

요리사, 셰프란 단어는 일견 동의어로 보일 수 있으며 실제 많은 사례에서 두 단어는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셰프는 선구자 셰프, 즉 자신만의 레시피를 개발하는 사람들이고, 요리사는 셰프의 레시피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들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 개발된 음식들이다. 밀, 토마토, 소금, 우유 모두 이미 옛날부터 있어온 것들이지만, 누군가 “이걸 다 한 데 때려 넣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먹어보면 어떨까”하는 과정에서 세계 최초의 피자가 만들어졌을 거란 말이다. 이게 바로 셰프의 하는 일이다.

그 후로부터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피자가 만들어졌는데, 이건 요리사가 하는 일이다.

셰프는 제1원리로부터 추론을 시작한다. 그리고 셰프에게 제1원리란 원재료들이다. 원재료들이야말로 셰프에게는 퍼즐 조각이고, 집짓기 블록이다. 셰프들은 자신의 경험과 본능, 미각을 이용해 이 블록을 아래로부터 쌓아올려 새로운 레시피 하나를 완성한다.

반면 요리사들은 자신이 한 번 먹어본, 맛있었던,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걸 본적이 있는 레시피를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한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요리사들이 있다. 한 편에는 이미 존재하는 레시피를 곧이 곧대로 따르는 요리사들이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식들은 레시피가 의도한 맛을 정확히 모방한다. 또 한 편에는 좀 더 자신감 있는 요리사들이 있다. 존재하는 레시피의 핵심만을 자기 것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스킬과 직관을 더해 좀 더 자신의 색을 더하는 요리사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음식은 원래의 레시피가 의도한 맛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면서도 요리사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돋보인다. 한 편, 채소로 만든 빵으로 양고기 버거를 만들거나, 땅콩버터와 쨈을 곁들인 피자, 계피x호박씨 케잌 따위를 만드는, 혁신가에 가까운 요리사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요리사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어쨌든 이미 존재하는 레시피에 근거해 자신의 요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가장 혁신적인 요리사들 조차 결국에는 햄버거, 케이크, 피자 등 이미 존재하는 레시피에서 이것 저것을 변주해 볼 따름이다.

요리솜씨 스팩트럼의 한쪽 극단엔 셰프가 존재한다. 그들의 요리 역시 요리사의 요리와 마찬가지로 맛이 좋을 수도 끔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셰프의 요리는, 원재료 선택부터 요리의 완성까지 자신만에 의한 추론에 의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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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돼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새로운 레시피의 개발이 목표가 아닌 이상에야 꼭 셰프가 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요리의 세계에서만큼은.

하지만 삶의 세계에서라면, 즉 “레시피”란 말을 “의사 결정 방식”란 말로 바꿔 놓고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셰프-요리사 스펙트럼 상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평상시 “생각하는 요리사”와 “생각하는 셰프”의 차이는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다. 제1원리 추론에 요구되는 정신적 에너지가 만만치 않고, 또 제1원리 추론을 일상의 모든 일에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사람 모두 평상시엔 자신들의 뇌 소프트웨어를 자동운행 모드로 돌려놓고 능동적인 의사 결정 행위를 멈춘다.

그러던 어느 날 신경 써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치자. 더 나은 마케팅 전략을 입안하라는 과업이 주어졌다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거나,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사랑에 빠졌다거나.

셰프가 됐든 요리사가 됐든 누가 됐든 이러한 상황에서 자동운행 모드를 고집할 수는 없다. 여기, 두 가지 선택지 놓여있다.

창조하기 혹은 모방하기.

셰프라면 “에휴 모르겠다. 시작이나 해보자”라면서 소매를 걷어 붙이고 평소 그러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가 하던 대로 할 것이다.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능동적 의사결정 모드로 돌려놓고 일에 착수한다. 갖고 있는 데이터를 보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점검한다. 세계의 현재 상황을 살피고 자신이 우선시하는 가치에 대해 돌아본다. 제1원리가 될만한 재료들을 조합해 합리적인 추론의 길, 즉 레시피를 완성한다. 레시피는 일종의 가설이며, 이 가설은 새로 유입되는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검증과정을 거치고 또 수정된다. 가설이 가진 결함은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보완된다. 레시피에서 설탕을 조금 덜어낸다거나, 소금을 추가한다거나, 주재료를 다른 재료로 바꾼다거나. 이 과정은 소프트웨어가 다시 자동운행 모드로 돌려져도 충분해질 때까지 반복된다. 결국 이 새로운 의사 결정은 소프트웨어 상의 자동화된 루틴의 일부가 된다. 셰프의 요리책에 새로운 레시피가 탄생한 순간이다. 셰프는 이제 이따금 새로운 정보들이 들어올 때에나 필요한 만큼씩만 레시피를 수정, 보완할 것이다.

요리사들은 앞의 문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깜깜할 따름이다. 요리사의 머릿속엔 “레시피가 그렇게 말했으니까”란 말만 가득하다. 그들의 소프트웨어는 정상적 의미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전산화된 카탈로그북에 가깝다. 중대한 결단의 순간, 요리사는 권위자에 의해 작성된 카탈로그북을 들춰보고, 그 안에서 끌리는 레시피를 선택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예수님”을 다른 신뢰받는 권위자의 이름으로 바꿔 넣은 셈인데, 많은 요리사들에게 있어서 이 권위자는 다시 집단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요리사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집단적 도그마에 의해 의사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 요리사는 부족의 요리책을 몇 번이고 읽어봤지만 이 경우에 딱 들어맞을 레시피를 찾지 못한다. 하여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신뢰하는 또 다른 권위자, 집단의 레시피를 찾게 된다. 알맞은 레시피를 찾은 요리사는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됐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레시피를 자신의 카탈로그북 사이에 끼워 넣어 놓는다.

요리사들은 주변 친구에게 도움을 부탁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카탈로그에선 필요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으니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리사들은 주변의 조언을 자신의 생각을 보완할 재료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그 조언으로 대체시킨다.

친구의 조언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걱정 없다. 그들에겐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 바로  “사회통념(이하 통념)”이란 것이 있다.

국가가 되었든 세계 전체가 되었든 사람들이 모인 곳은 “통념”이 존재하고, 통념은 그 자체로 도그마로 빼곡한 요리책이다. 그리고 큰 규모의 부족일수록 보다 피상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도그마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1992년을 마지막으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국토교통부 홈페이지 같은 통념도, 기댈 곳 없는 요리사들에겐 믿음직한 친구가 된다.

사업을 구상 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여러 가능성들에 대해 점쳐보고 있는 요리사는 기존의 통념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입력창이 열리면 커맨드를 입력하고 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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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죽은 요리사는 기계에 감사해하며 자신의 현실박스를 업데이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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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요리사는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자동운행모드로 돌려놓는다.

이러한 요리사적 사고방식을 머스크는 “제1원리에 입각한 추론”과 대비되는 뜻에서 “유추를 통한 추론”이라 완곡히 부른다. 옆자리 친구의 답안지를 베끼다 걸리면 “유추를 통한 추론”이었다고 둘러대면 된다.

주변을 둘러보면 요리사/셰프 비유가 들어맞을 상황이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음악, 회화, 기술, 건축, 저술, 경영, 코미디, 마케팅, 앱 개발, 축구 코치, 교육, 군전략 등 모든 분야에는 분야 나름의 요리사와 셰프가 있다. 콘서트에서 직전 앨범 레퍼토리를 영혼 없이 반복하는 밴드처럼, 요리사나 셰프나 평상시에는 다들 자동운행 모드를 켜놓는다. 하지만 중대한 결정의 순간, 빈 캔버스를 꺼내거나, 새 워드파일을 열거나, 빈 설계도면을 펼쳐야만 할 때 진정한 빛을 발하는 쪽은 셰프다. 요리사들이 모방할 때, 셰프들은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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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물의 차이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요리사들은, 그나마 혁신적인 축에 끼는 요리사들조차도, 웬만한 운이 따라주지 않는 이상, 그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충격에는 한계가 있다. 셰프라고 매번 좋은 결과물만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질과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 된다면 어느 정도의 파급력은 거의 확실하다. 셰프는 큰 판만 벌리는 용감한 사람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작은 판을 즐기며 그 안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강한 개성의 셰프 역시 존재한다. 셰프가 된다는 것은 엘론 머스크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추론 산업”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추론 산업”의 일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셰프/요리사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의사 결정의 매 순간 추론 산업의 일원으로서 일하고 있다.

수많은 측면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재 우리의 삶은 한 장의 추론 산업 음반과도 같다.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음반의 트랙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작곡할 것인가? 새 곡을 쓰면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깊은 성찰을 할 것인가? 이미 있는 드럼비트와 코드진행 위에 새 멜로디만 씌울 것인가? 아니면 그저 남의 곡을 그대로 베껴 녹음할 것인가?

당신이 여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고 싶어할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셰프답게 하는 게 낫겠지!” 성실 vs 나태, 윤리적 vs 부정직, 사려 깊음 vs 이기적 등등 삶에서 나타나는 주된 가치 척도와는 달리, 셰프 vs 요리사의 척도는 그것이 바로 우리 앞을 가로지르고 있을지언정 있는지조차 알아차리기 어렵다.

차이 알아차리기

요리계에서의 셰프-요리사 스팩트럼처럼, 현실세계에서의 셰프-요리사 역시 스팩트럼의 형태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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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위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나는 요쯤 있겠지.”하면서 자신의 실제 위치보다 훨씬 더 오른쪽 스펙트럼을 짚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보다 더 요리사의 편이다. 서 있는 자리에선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잘 안 보이는 것뿐이다.

정의상 요리사들은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미 존재하는 레시피를 따르기 때문에 요리사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은 얼마 없다.

우리는 “따르는 사람”이란 말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능동적이지 못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는다. 자신이 직장에서 쥐고 있는 리더로서의 포지션과 발언권 등을 가지고 난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고 즉 “요리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당신이 현재 속해있는 그 집단 안에서나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 것밖에 증명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 이를 두고 짓궂게 한 마디 던진 적이 있다.

“이 양 떼 중 가장 흰 양이 되려면, 우선 양부터 되어야 한다.”

당신은 어쩌면 당신의 세계에서 스타이거나 리더일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이 애초에 그 목표를 선택했던 핵심적인 이유가, “이건 정말 멋진 일이야”, “다른 부족 애들이 넋 놓고 부러워할 일이야” 라고 말하는 부족의 요리책의 달콤한 말들 때문이었다면 당신은 이미 리더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아주 성공한 따르는 자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당신을 멋지다고 하는 그 사람들보다 딱히 나을 바 없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선 모든 요리사들의 진정한 리더가 보일 때까지, 즉 “요리책”이 보일 때까지 한참 줌-아웃을 해야 한다.

줌-인 상태에서는 독창적이고 특별하게만 보이던 것들도 줌-아웃 상태에선 달리 보일 수 있다. 개성 있고 독립적이라 여겨지던 사고방식도 어쩌면 이미 존재하는 도안 위에서 벌어지는 점 잇기 놀이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신념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사실은 부족의 교리일 수도 있다. 독창적인 견해로 여겨지던 것이 그저 미디어나 부모님이나 친구나 종교나 셀러브리티에 의해 주입된 정보일 수도 있다.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한 그 험난한 길이 사실은 부족에 의해 이미 승인된 포장도로일 수도 있다. 창조성의 발현으로만 보이던 것이 사실은 색칠연습장에 색 채워 넣기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착시현상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사고 방식이 가진 결함을 캐치하지 못하고 위대한 인물이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엘론 머스크, 스티브 잡스, 알버트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적이며 독립적인 사유의 끝판왕들의 성공 비결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 그들의 더럽게 좋은 하드웨어?

우리는 엘론 머스크를 신이 내린 지능과 넓은 시야, 초인적 배짱을 가진 사람으로 여긴다.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타고난 것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러니까 셰프-요리사 스펙트럼이 우리 눈에는 아래처럼 보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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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점에서 우리 역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셰프들이긴 하다. 엘론 머스크는 그 중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셰프로 보인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엘론 머스크 모두에 대한 과대평가이다. 마치 타자기들이 컴퓨터를 보고 “와, 이 타자기 죽이는데?”라고 말하는 셈이랄까.

머스크가 훌륭한 셰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가 훌륭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사실은 셰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뇌 소프트웨어가 무엇인지도, 그것이 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스스로의 뇌를 컴퓨터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사이의 구분을 헷갈리는 것이다. 우리는 뇌를 하드웨어라고만 여기는데, 이건 뇌를 변하지도 발달하지도 않는, 그저 타고날 뿐인 무언가로 보는 관점이다. 우리가 어떻게 추론이란 것을 하느냐 하는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추론이란 걸 우리는 몸 속에 피가 흐르듯 그저 그냥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일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사고를 여기에서 멈추면 곤란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차이를 모른다면 셰프의 소프트웨어와 요리사의 소프트웨어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선 더욱이 알 수 없게 된다.

사고 소프트웨어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즉 이것이 중요한 삶의 스킬이자, 배움과 연습을 통해 개선될 수 있는 것이며, 또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삶이란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스스로의 요리사적 사고방식을 독립적 추론방식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추론이란 게 새로 만들어질 수도 카피될 수도 있는 것임을 모르는 것은, 셰프들의 독립적 추론을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비상하고 마술 같은 능력쯤으로 여기게 만든다.

세 가지 사례를 통해 다시 살펴보자.

1) 우리는 쉐프의 냉철한 현실 인식을 미래에 대한 비전인 것으로 착각한다.

엘론 머스크의 동생 토스카 머스크가 얘기한 적이 있다. “엘론은 벌써 미래에 갔다 왔고, 지금은 자기가 미래에서 뭘 봤는지 말하고 있는 거에요.” 많은 사람들이 엘론 머스크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예지 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볼 수 없는 뭔가를 그는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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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상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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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념은 변화가 늦다. 무언가가 실제로 현실화된 시점과 그것의 현실화가 통념에 반영되기까지에는 꽤나 큰 시차가 있다. 그리고 통념이 여차저차 변한 그 시점에 이미 현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다. 하지만 셰프는 여기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신의 눈과 귀와 경험에 의지하기보다는 추론에 의지한다. 통념을 듣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실시간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최신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셰프는 나머지의 사람들에게는 인가되지 않은 정보에 입각해 행동 할 수 있다.

2) 우리는 쉐프의 리스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용기인 줄로 착각한다.

머스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릴 적 저는 어둠을 정말 무서워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 어둠이란 그저 파장의 길이가 400에서 700 나노미터 사이인 광자의 결여 상태임을 알게 됐죠. 그러고서는 광자의 결여 상태를 무서워하는 건 참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닿았고, 그 이후론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꼬마 셰프가 실제로 주어진 상황과 팩트를 점검하고 자신의 공포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장면이다.

성인이 된 머스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업을 시작하는 일에 너무 겁을 많이 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솔직히, 나빠질게 더 뭐가 있겠나요? 굶어 죽을 일도 없고, 얼어 죽을 일도 없는데?

같은 말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머스크가 본질적으로 말하는 바는 “사람들은 X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서움은 비논리적이다. 그러므로 난 X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건 용기가 아니라 논리이다.

용기 있다는 말은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말은 스스로를 위기에 노출시킨다는 말이다.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꼬마 엘론 머스크가 불 끄고 잠드는 걸 두고 참 용기 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유다. 위험요소가 실재하지 않는 상황에 뛰어드는 것을 두고 용기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두 번째 인용을 통해 머스크는, 사업 시작하기의 무서움과 어둠의 무서움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무서움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업이나 어둠이나 모두 실제론 위험한 일이 아니란 것이다.

자신의 모든 자산을 SpaceX와 Tesla에 쏟아 붓던 순간의 엘론 머스크는 대담했던 것일지언정 용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용기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이건 엘론 머스크란 셰프가 수집된 정보들을 이리저리 짜맞춰보다가 가장 논리적으로 납득 가능한 플랜을 내놓은 거다. 성공이 확실시 됐기 때문에 지른 것이 아니라(사실 그는 SpaceX의 실패확률을 굉장히 높게 잡고 있었다), 계산 상 위험요소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른 것이다.

3) 우리는 쉐프의 독특한 고유함(originality)을 남과 비교해 특출난 재능으로 치부한다.

사람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 데엔 지능과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오히려 독립성이다. 고정관념을 본 척도 안하고 밑바닥에서부터 사고를 쌓아 올린다면, 당신이 똑똑하든 똑똑하지 못하든 간에, 결국에는 아주 고유한 결과물을 낼 수밖에 없다.

만약 당신이 타국을 여행 중인데, 여행 가이드북을 던져버리고 아무 목적 없이 떠돌아다닌다면, 결국에는 아무도 겪지 못했을 특별한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례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보통 그를 여행 전문가라든지 대담한 모험가쯤으로 여기게 되겠지만, 그 사람이 한 일이란 결국 여행 가이드북을 집어 던진 일 밖에 없다.

이처럼, 한 예술가나 과학자나 기업가가 유추를 거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추론한다면 그가 만들어낼 결과물은 A)매우 성공적이거나 B)적어도 고정관념 바깥의 것일 확률이 높다. 사람들을 이를 두고 혁신이라 말할 것이고 셰프의 특출한 재능은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만약 결과물이 정말로 성공적일 경우, 모든 요리사들은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 즉 모방을 시작할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혁명이라 부른다.

유추를 통해 추론하기를 지양한다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도 셰프들은 자신이 임한 모든 프로젝트에서 큰 성취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이런 종류의 키보드보단 저런 종류의 키보드가 인기가 많은 거 같아. 키보드로 숫자 치는 게 어려워서 불평도 많고. 그러니까 우리 모두 창의성을 발휘해서 최고의 핸드폰 키보드를 만들어보자!”라고 말하면서 핸드폰 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게 아니다. 그들의 질문은 “미래의 모바일 기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였고, 밑바닥부터 추론을 시작한 끝에 전통적인 형태의 물리적 키보드가 그들의 설계도에서 사라진 것이다. 아이폰을 디자인하는 데에 필요했던 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그저 베끼지 않을 능력이었다.

비슷한 사례는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건국시조들은 눈 앞에 놓여있는 새로운 땅을 두고 “왕은 어떤 방법으로 선출되어야 하는가? 왕의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까? 그들에게 ‘왕’은 애플의 물리적 키보드와 같은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국가란 무엇인가? 민중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였다. 그들의 국가 구상 과정 중에 ‘왕’은 그들의 선택지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제1원리부터 추론하기가 그들로 하여금 존 로크의 플랜을 신뢰하게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건국을 했다.

역사란, 천재로 위장했지만 까보니 제1원리 추론의 달인이었던 셰프들의 혁명 이야기이다. 뿔뿔이 흩어져있던 부족들을 규합해 큰 세력을 일궈 세상을 휩쓴 칭기즈칸. 기존의 통념을 깨고 조립라인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던 핸리 포드. 파격적인 방법으로 방사선 이론을 개척한 동시에 “원자는 쪼개어질 수 없다”는 기존의 학설을 깨버린 마리 퀴리(그녀는 탑클래스 셰프들에게만 주어지는 노벨 화학상과 물리학상 모두를 받았다). 핸리 데이비드 소로에 영감을 받아 비폭력 시위를 이끌었던 마르틴 루터 킹. 연결된 웹페이지의 숫자로 페이지의 중요도를 평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판단해 기존의 웹서치 방식을 폐기한 레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세계 최고의 요리사 밴드 왕좌와 틀에 갇힌 기존의 작곡법 모두를 1966년도를 기점으로 모두 포기하고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사운드를 선보여 진정한 락큰롤 셰프로 거듭난 비틀즈.

시간, 공간, 특정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뭔가 큰 일이 터질 때는, 그 중심에 거의 항상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셰프가 있다. 그들은 마술사가 아니라 그저 자기 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밑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굴러왔으며, 우리는 그저 무임승차자일 뿐이다.

물론 엘론 머스크가 엄청난 재능을 가진 경악스러운 야심가이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엘론 머스크의 비상함은 그의 소프트웨어의 비상함에서 비롯한다. 군계일학. 요리사들 가운데의 셰프, 홍수론자들 가운데의 지질학자. 뇌 소프트웨어가 뭔지 이해도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의 유일한 뇌 소프트웨어 개발자.

엘론 머스크의 비밀 쏘오스는 바로 이것이고, 이것은 이 글이 머스크에 관한 글이 아니라 바로 우리에 관한 글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연재의 진정한 목적은 엘론 머스크가 화석연료 자동차 시대의 막을 내리려는 이유, 로켓을 쏘아 올려 화성을 식민화시키려는 이유를 밝히는 데에 있지 않다. 나는 엘론 머스크같은 사람들은 왜이리 드문가를 밝히고자 한다.

왜 테슬라는 전기차에 집착하는가, 왜 스페이스엑스는 로켓 재활용 기술에 저토록 목을 매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문제는 왜 저 회사만 저걸 하고 있는가이다.

엘론 머스크라는 미친 과학자의 속마음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쏟아 부은 결과, 우리는 엘론 머스크만이 유일한 정상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로 놓고 보자면 엘론 머스크는 딱히 매력적인 연구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이야기가 여기에 섞여있어서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야말로 이 연재를 통해 내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이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겁에 질린 요리사가 되고 만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저 거침없이 자신만의 길을 뚫어나가는 셰프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셰프가 되는 법

인류의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온갖 이상 현상들은 인류의 진화 상의 결함 때문에 벌어졌을 확률이 높다. 우리가 자꾸 요리사에 머무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셰프보다는 요리사 쪽에 경도되는데, 이것은 부족 생활을 거쳤던 인류의 진화사와 관련이 깊다. 첫째, 부족 사회에선 구성원들이 요리사가 되는 편이 더 낫다. 기원전 5만 년 전, 독립적 사고의 달인들로 이뤄진 부족이 있었다면, 이 부족은 하루하루가 끝도 없는 논쟁과 파벌간의 다툼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반면 강력한 카리스마의 지도자 한 명과 그를 따르는 다수의 추종자들로 이뤄진 부족은 지속적으로 생존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종류의 부족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다른 종류의 부족들보다 많이 후대로 물려줄 수 있었다. 우리가 셰프보다는 요리사에 가까운 사람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녕을 위해 요리사가 된다. 셰프가 되는 DNA는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의 자기보호는 독립적 사고에 의해 좌우된 적이 없다. 부족에 잘 스며들고, 족장의 말을 잘 들으며, 살아 남기에 도가 튼 원로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편이, 그리고 그것을 자녀에게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에 훨씬 나은 방법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있는 레시피대로만 하라는 요리사 엄마 아빠들로 가득한 요리사의 세계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유이다.

생존을 위해 태어난 우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요리사의 사고방식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생존이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닌 이례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잠재우고 좀 더 까다롭고 미묘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문제는 우리들 중 대부분이 5만 년도 더 된 구식 생존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태어날 수 있었던 복마저도 우린 이걸로 다 날려버린 셈이다.

참으로 재수도 없는 딜레마이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요리사로 살아갈 필요가 없는 세계라는 계시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요리사로 살아간다. 그리고 요리사처럼 살아가고 생각하는 이상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고 개선하는 방법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계시를 납득하지 못한다.

셰프가 되는 비결이란 결국 이런 고약한 악순환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냐고?

그 전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세 가지의 계시가 있다. 쉐프는 알지만 요리사들은 모르는 세 가지 비밀.

계시 1)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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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세기의 홍수론자들이 특별히 멍청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이라고 모두 반-과학 운동을 하던 양반들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다른 지질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역시 희생자들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기만 하라는 종교적 도그마의 희생자. 그들이 따르던 레시피는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성서였다. 그 결과 자신들 논리의 중대한 결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길의 막다른 끝으로 다다랐다. 소프트웨어 상의 버그는, 지구는 6000년 전에 만들어졌으며 그 사이에 한 번 엄청난 규모의 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머릿속에 부정될 수 없는 제1원리로 새겨 넣었다는 것이었다.

그 버그 하나 때문에 모든 연산 과정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망가진 가정 위에 쌓아 올려진 모든 추론과 사고는 결코 진리에 닿을 수 없었다.

홍수론자들은 도그마의 희생자인 동시에, 자기확신의 희생자였다. 자기확신 없이 도그마는 힘을 잃으며, 신앙 대신 구체적인 데이터가 믿음의 증거로서 요청되는 순간 거짓된 도그마는 설 땅을 잃는다. 홍수론자들을 자빠뜨린 것은 교회의 도그마가 아니라 신앙 자체를 확신의 근거로 하는 교회식 사고방식에 있다.

“지식의 가장 큰 적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의 환영입니다.” 스티븐 호킹의 말이다. 지질학자들이나 홍수론자들이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시작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질학자들은 자신들이 뭘 잘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실에 닿을 수 있었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를 복창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뭔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유명한 과학자 중 아무나 한 명 골라잡고 그 사람이 남긴 어록을 읽어보면 된다. 다들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진리의 대해(大海)를 앞에 둔 바닷가에서 한 개의 조개를 주운 것에 불과하다.”
아이작 뉴턴

“내가 가지고 태어난 무지 중 극히 일부만을 나는 살아오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리차드 파인만

“내가 입 밖으로 내는 모든 문장은 확언이 아니라 질문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 닐스 보어

머스크의 버전도 있다.

“자신이 틀렸을 거라는 전제 하에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좀 덜 틀리는 것일 뿐.” – 엘런 머스크

이 미칠 듯이 똑똑한 사람들이 이토록 겸손할 수 있는 이유는 검증되지 않은 확신이야 말로 가장 공허한 앎이며 합리적인 사고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사고는 교회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다.

셰프처럼 되고 싶다면 우선 실험실에서 사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말인 즉 우리가 하는 사고들 중 어떤 것이 교회 안에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와 우리들 자신의 소프트웨어 사이의 관계가 나의 할머니와 그녀의 컴퓨터 간의 관계와 사실상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앞에 있긴 하니 가끔 필요할 때마다 쓰기도 하는데, 이게 애초에 왜 작동하는지 어디가 망가졌는지 어디가 망가지지 않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관계는 우리가 소유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 우리는 사물의 사용자에 머물 따름이다. 자동차니 전자레인지니 핸드폰이니 전동칫솔이니 하는 것들을 대강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지만 망가지면 일단 기사를 불러야 한다. 왜냐면 우리들은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 물건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모델은 우리의 뇌 소프트웨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좋은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매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매해 똑같은 결과만 내며 살아가는 것은 변하지 않는 우리의 뇌 소프트웨어 때문이다. 이러다 결국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처럼, 어느 날 잠에서 깨자마자 “여태 살면서 나 스스로 선택한 일이 과연 하나라도 있었던 건가 싶다. 생을 통틀어 내가 이루었노라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소프트웨어의 사용자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의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당신의 차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우선 차의 모든 부품을 가능한 한 작은 단위로 분리해 놓고 각각을 살펴본 후 이것들이 서로와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봐야할 것이다. 이를 우리의 사고에 적용하려면 우리는 우선 네 살 먹은 자신의 상태로 돌아가서, 옛날 옛적에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강제종료 시킨 “왜요?” 놀이를 계속해야 한다. 소매를 걷고, 후드를 열고, 손이 더러워질 각오를 마쳤다면 이제 재미없는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여태까지 삶을 대하던 방식이 방금 질문의 답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인가?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끊임없이 왜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서 비로소 당신은 당신이 현재 교회에서 살고 있는지 실험실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발견한 밑바닥이 당신의 현실과 내면적 자아를 바르게 비추고 있는 제1원리들로 이뤄져 있고, 이로부터 논리가 곧고 일관성 있게 뻗어 올라가고 있다면 당신은 실험실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통해 닿은 그 밑바닥에서 발견한 것이 “XX가 그렇게 말해서”라면, 즉 당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부모님이나 친구나 당신이 믿는 종교나 사회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면 당신은 교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의 신조가 당신과 공명하지 않는다거나 당신의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당신이 여태껏 애먼 레시피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던 거라면, 이것을 바탕으로 내려왔던 결론들은 그만큼 모두 틀린 것이다. 홍수론자들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고라는 쇠사슬의 전체 강도는 그것의 가장 약한 연결부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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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들이 태양을 포함한 태양계 내 행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종류의 벽에 부딪혔다. 그러던 어느 날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로부터 그들을 곤란하게 했던 모든 계산상의 어려움들이 명쾌하게 설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천체에 관한 연구는 크게 발전한다. 그들이 “왜요?” 놀이를 좀 더 일찍 시작했었더라면, “왜 우리는 지구가 모든 사물의 중심이라고 알고 있지?”라고 일찍 질문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소프트웨어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거짓 도그마라는 암 덩어리를 발견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이다. 이것을 발견해 내고 고쳐내는 일은 당신의 사고 회로 전체를 크게 강화시킬 것이고, 나아가 인생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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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살펴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검증 되지 않은 확신이다. 이론은커녕 가설도 못될 것에 대해 확신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수학적 증명의 수준으로 확신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구체적이고 검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것이거나,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도그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와서 직장을 그만두는 건 큰일 날 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도, 신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도, 대학에 꼭 가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도, 방학을 빡세게 보내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도, 내가 기타 치는 걸 모두가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가정들이 당신이 직접 알아내고 경험한 데이터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잘해야 가설이고 최악의 경우 완전히 틀려먹은 도그마일 수도 있다.

이러다 자기 회의, 자기 혐오, 자아정체성 위기에 빠져 버리면 어쩌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앞서 말한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첫 번째 계시조차 굴욕에 관한 것이 아니던가. 굴욕감은 우리를 시작점을 데려다 놓는다. 굴욕감으로부터 모든 여행은 시작된다. 하지만 확신이 가져다 주는 자만감은 시작점인 동시에 도착점이다. 자만감에서 모든 여행은 끝난다. 그래서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고백이 중요한 것이다.

계시 2) 다른 사람들도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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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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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고전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1837년 한스 크리스찬 앤더슨이 쓴 이 이야기는 인간의 광기를 잘 표현한다. “틀린 것같이 보이긴 하는데, 남들이 다 맞다고 하니 나도 맞다고 해야겠다. 그래야지 바보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까”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영상 보기)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 넌 너의 삶이나 잘 살거라.”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예쁜 가정을 꾸리고 돈도 좀 모으고 그렇게 재미나게 살면 되는 거다.” 이런 말들은 사실 인생을 제약하는 말들입니다. 인생을 넓게 바라보고 싶다면 제 말을 기억하세요. 당신이 인생이라 부르는 그것은 당신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영향을 미칠 수도, 당신만의 창조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당신은 결코 이전의 당신이 아니게 될 겁니다.

“넌 아무것도 모를지도 모른다. 근데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아무것도 모른다. 황제가 옷을 벗고 있다면 벗고 있다고 말하면 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의 눈을 믿으면 될 일이다. 당신이 모르는 건 남들도 모른다.”는 말을 잡스가 잡스 식으로 한 말이다.

이해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믿고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운 말이다.

첫 번째 계시의 목적은 당신이 열심히 암기해온 도그마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깨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각은 생각보다 쉽게 부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거였네”란 생각은 예상보다 우리 의식 깊지 않은 곳에 숨어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계시는 녹록치 않은 무게의 함의를 가진다. 주변 사람들과 부족과 사회의 상식에 대한 우리의 착시는 그 자체로 우리 자신에 대한 착시보다 더 큰 부피와 질량을 가지고 있다. 발가벗은 임금님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서도 결국 남들의 거짓말에 동조하게 되듯.

이것은 남(타인)에 대한 믿음(타신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자신감),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 사이의 혈투다. 대부분의 보통 요리사들의 내면에서 승리하는 쪽은 타신감이다.

판을 흔들기 위해선, 사회적 통념, 부족의 도그마, 일반 대중, 외부적 권위에 대한 존중(respect), 즉 타신감부터 버려야 한다. 세계의 셰프들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그들이 이 존중을 벗어 던짐으로써 얻은 결과물이다.

게임 체인져란 룰을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딱 그 정도까지만 게임을 존중하는 사람들이고, 선구자란 이미 뚫려있는 길을 믿지 않고 자신이 새로운 길을 뚫는 사람들이며, 개척자란 지금 서있는 바닥 역시 별볼일 없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믿고 이를 굳이 지킬 이유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다.

사회에 대한 존중을 버리라는 것은, 우리가 자라면서 배워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가르침이다. 하지만 당신의 눈과 경험이 말해주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다.

사회적 통념이 사실상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의 근거는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현상유지를 지상의 가치로 삼는 사회적 통념은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이런 꼴로 벌어지는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손쉽게 가정한다. 그리고 역사라는 것은, 현상유지라는 도그마가 이따금 혜성처럼 등장하는 셰프들에 의해 거짓이었음이 입증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라는 공간에 대해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알려주는 단서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엉망인 회사. 사생활 관리가 안 되는 고위층 인사들. 유치하고 시시한 농담들로 가득한 인기 시트콤. 세상을 나보다도 모르는 것 같은 정치인들.

사회적 통념이 옳다는 것을 표면적으론 납득할 수 있겠지만, 사업을 부흥시킨다거나, 엄청난 부를 쌓는다거나, 연예인처럼 유명해진다거나, TV쇼를 제작한다거나, 국회의원에 당선된다거나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하는 의심은 여전히 뒷통수 저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회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는 데에 필요한 것은 실제 경험이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해외여행, 특히 배낭여행의 실상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기 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이 가지 말라는 곳만 골라 다니면서 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이 완전히 틀렸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많은 경험과 더 많은 데이터들이 모임에 따라 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다. 자신감이 커질 수록 나의 목적지는 태국, 스페인같은 곳으로부터 오만, 우즈베키스탄 같은 곳으로 옮겨갔고, 급기야 나이지리아, 북한 같은 곳으로까지 옮겨갔다. 여행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가지던 생각은, 대체로 검증되지 않은 도그마들과 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막연한 느낌에 근거한 것이며, 이것은 나의 경험과 탐구에 의해 도출된 결론 앞에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 여행 목적지를 고르는 일에서라면 나는 셰프가 되었다.

나는 여행가로서 배운 교훈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시켜보고자 했다. 사회의 시선이나 통념 앞에서 좌절할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저들은 내게 북한은 위험한 나라라고 말하던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다”라고. 삶의 각기 다른 부분에서 셰프가 되기 위한 도약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요리사에서 쉐프로의 도약이 성공할 때마다, 미래의 도약은 점점 수월해진다. 결국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신뢰하는 것 자체가 삶의 습관으로 굳어지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더 이상 이전의 자신이 아니게 된다.

첫 번째 계시는 자만심이라는 자기보호의 껍질을 깨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지적 겸손이라는 시작점을 설정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 계시는 진정한 자신감, 즉 지적 겸손을 토대로 유추가 아닌 제1원리에 바탕한 길을 내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 자신감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근데 남들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지구에서 아는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라는 자신감이다.

계시 3) 우리는 GTL(Grand Theft Life)를 플레이하는 중이다.
(역자 주: 게임 GTA(Grand Theft Auto)에 대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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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계시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소프트웨어의 배를 째, 그 속의 부품들 중 어떤 것들이 내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설치된 것인지를 식별할 후, 원해요 박스와 현실 박스를 자신의 생각들로 채우고, 자신에게 맞는 목표와 전략을 설정하는 방법을 배웠다.

마침내 우리들은 필요한 모든 도구와 장비를 갖춘 채 실험실에 들어선다. 근데 뭔가를 놓치고 있단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벌거벗은 임금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임금님이 자신의 물건을 덜렁거리며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보았다. 옷이 보인다고 말하던 사람들과 임금님이 발가벗고 있다던 꼬마.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총 네 부류이다.

1) (앎을 확신하는) 오만한 요리사
순도 100% 도그마 쥬스를 들이킨 사람이다. 자신만의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를 내길 멈춘지 오래이다. 그의 생각과 그가 따르는 도그마는 그의 머릿속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그에게 도그마는 진리이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이 도그마인지 아닌지조차 모르니, 그는 스스로를 도를 깨친 현자쯤으로 여기고 도그마의 확실성이 자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다고까지 느낀다. 임금님이 걸어 나와 내가 입은 근사한 옷 좀 보라며 소리지를 때, 오만한 요리사의 눈에는 실제로 그 옷이 보인다.

2) 불안한 요리사
이들은 첫 번째 계시를 겪은 오만한 요리사들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사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사실 정도는 자각하고 있다. 이유가 어떻든, 그들이 맞다고는 생각이 드는데, 자꾸만 그들과 겉도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만한 요리사들에 둘러싸인 불안한 요리사는 정신적으로 길을 잃고 만다. 왜 나는 이토록 멍청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하고 있는 걸 이해 못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한다. 남들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나의 멍청함이 발각되지 않길 빌며. 임금님을 바라보는 불안한 요리사의 마음은 곧 울적해진다. 자기 눈에는 근사한 옷 대신 왠 듬성듬성 털이 난 살덩어리만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한 요리사는 수치심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 환호성을 지른다.

3)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
이들은 두 번째 계시를 겪은 불안한 요리사들이다. 두 번째 계시는 일종의 선악과인데,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은 이걸 한 입씩 깨물어 먹어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에도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이게 다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통념이라는 것들이 그 자체로 신앙에 근거한 도그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을 비롯한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실은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밴드웨건에 섞여 들기보다는 그 자신만의 사유를 진전시켜야 함을 느낀다. “세상에, 저 미친놈이 진짜 아무것도 안 걸치고 나왔네. 헐, 게다가 이 많은 사람들이 옷이 정말로 보이는 척하고 있단 말이야? 이 미친 곳에서 얼른 빠져 나와야겠어.”

임금의 멍청한 결단과 사람들의 무식한 연기를 폭로하려는 순간, 뭔가가 그의 목구멍에 걸린다. 땀범벅의 뒤룩뒤룩한 임금의 몸뚱아리엔 실 한 오라기 조차 걸쳐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지만, 그걸 실제로 큰 목소리로 까발린다고? 결국 튀는 짓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면서.

임금님의 옷이 정말 멋지지 않냐며 묻는 다른 요리사들에게,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4) 셰프
벌거벗은 황제의 이야기 속의 꼬마이자, 머릿속의 근거 없는 공포를 떨쳐낸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이다. 셰프는 모든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이 거쳤던 내적 추론과정을 마찬가지로 거쳤지만, 때가 찾아왔을 때 분연히 일어서 진실을 외치는 사람이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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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복잡한 존재이다. 인간인 우리는 삶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네 종류의 배역을 상황에 맞게 연기한다.

내겐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가 넷 중 가장 신기하게 느껴진다.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 역시 셰프와 마찬가지로 자기 주변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셰프가 될 수 있었던 직전의 기로에서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완벽한 날개를 가지고도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못한 사람들이다.

다른 요리사들과 함께 절벽 위에 서서, 자기 것과 똑같은 날개를 단 셰프들이 몸을 던지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쳐다봐야만 한다. 셰프들은 가졌지만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바로 용기이다.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은 왜 용기가 없는 것일까? 셰프의 이야기로 우선 돌아가보자.

셰프들에게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연구실이며, 인생은 수 천, 수 만 번의 실험으로 이뤄진 하나의 랩 세션이다. 셰프는 사회라는 체스판 위에서 어떻게 말을 움직일지 고민하는 자들이다.

셰프는 자신의 목표와 도전을, 새로운 정보의 습득이 그 자체로 목적인 하나의 실험으로 여긴다. 부정적 피드백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질문에 엘론 머스크가 한 답변이 이를 잘 표현한다.

저는 남들의 피드백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제 관점에 오류가 있거나 개선의 여지가 있음이 발견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던 게 알고 보니 잘못된 거였네. 다행히 이젠 저 그릇된 믿음을 버릴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논리적 모델을 가급적이면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요.

연구실의 셰프에게 부정적 피드백은 남이 던져준 베푼 공짜 버프 물약과도 같다.

“실패”. 우리의 가슴을 벌렁이게 하는 것. 세상의 모든 이름난 셰프 중 실패에 관한 명언 한 마디 남기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실패는 재도약의 기회, 좀 더 똑똑하게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이다.” – 헨리 포드

“성공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열정을 잃지 않는 데에 있다.” – 윈스턴 처칠

“700번 실패한 것이 아니다.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경우 700가지를 검증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 토마스 에디슨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실패를 대하는 방식만큼 훌륭한 교훈은 없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있다. 가설을 시험하여 새로운 사실을 배운다는 것이 과학적 접근 방식의 핵심이다. 가설은 틀렸음이 입증되는 그 순간을 위해 세워지며, 이는 곧 과학자란 실패를 통해 배우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야말로 전 프로세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과학자가 암 치료법을 개발 중이라고 쳐보자. 한 명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무모한 실험들을 하면서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로부터 배운다. 다른 한 명은 실패 확률을 최대한 낮추기로 마음먹고,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입증된 실험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실험만을 한다. 당신은 두 과학자 중 어느 편에 돈을 걸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하나의 연구실처럼 대하고 그들의 삶을 실험 세션처럼 살아간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그것이 성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을 머뭇거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해 1: 그릇된 공포

셰프의 용기란 사실 리스크에 대한 정확한 평가임을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이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이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도그마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그들은 도그마의 번지르르한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모든 내면의 공포를 일일이 평가하고 검토하는 것을 비효율적인 일로 여기게끔 진화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조심하자”의 철학을 내면화한다. 예컨대, 어떤 공포가 실재하는 위험요소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내면에서 “진짜 공포”로 분류될 것이고, 나중에 그 공포가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라 밝혀지더라도 “만약을 대비해” 계속 내면에 남겨진다. “후회했을 땐 이미 늦었”을 테니까.

“진짜 공포” 캐비넷은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합리성의 중추보다도 훨씬 깊은 곳, 의식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스스로를 위험요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진화적 관점에서 위험요소란 “내 유전자를 아랫 세대로 물려주는 일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 곧 “짝짓기를 못하는 것, 죽는 것, 자녀가 죽는 것”이다.

부족시대에서의 생존을 위해 형성되었던 우리의 요리사적 습성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5만 년 전 에티오피아에서나 먹혀 들었을 본능이고 현재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우리는 항상 상황에 비해 과장된 공포를 느낀다. 예컨대, “회사에서 잘려버렸네. 엄마 아빠 집에서 몇 달 신세를 져야 하는데 어떻게 말씀 드리지?” 정도의 상황에서, 매번 우리는 “매머드 사냥을 공 쳤으니 집에 있는 애새끼들은 겨우내 다 굶어 죽게 생겼네” 수준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는 것들을 향해서도 공포를 느끼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다. 우리는 고속도로에서 문자 질 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는 걸 더 무서워하고, 엉뚱한 사람과 결혼해버리는 일보다 매력적인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일을 더 무서워하며, 50년 동안 아무 보람도 비전도 없는 직장에 종사하는 것보다 주변 친구들과 똑같은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지 못할 일을 더 무서워한다. 이게 전부 쪽팔리는 것, 차이는 것, 무리에 섞여 들지 못하는 것이 수렵-채집 문명에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험 등급 평가 기준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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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들이나 셰프들이나 실재하는 위험요소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똑같다. 그림의 “실제로 위험함” 영역에 들어선 셰프들, 예컨대 감옥에 잡혀 들어갔거나 구제불능의 자금난에 빠져버린 셰프들은 사실 셰프가 아니라 “나는 무적이다”라는 도그마에 묻혀 사는 요리사에 불과하다. 초인적인 용기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 셰프들은, 실제로는 “셰프의 연구소” 수준의 위험 단계에서 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셰프의 연구소”야말로 소원 성취로 통하는 모든 길이 포개어져 있는 영역이다. 이 영역으로 들어설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안으로 발 한 짝 들여놓기조차 무서워한다. “저긴 진짜로 위험한 곳이야”라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앞에 놓인 위험요소를 유추를 통해 평가하고 이로부터 그릇된 공포에 말려든다.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이 흔히 걸려들게 되는 함정이다.

오해 2: 그릇된 정체성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의 또 다른 문제점은, 자기의 정체성을 과학자가 아니라 자꾸 실험 그 자체와 동일시 한다는 데에 있다. 자기는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과학자일 뿐인데 자꾸 착각한다.

앞서 언급한 바, 의식적인 집단 구성원들은 스스로 사유에 의해 결론을 내린다. 한편, 맹목적인 집단 구성원들은 자기 자신이 집단의 결론 그 자체이다. 당신이 믿는 것, 당신이 상징하는 것, 당신이 선택하는 것 모두가 당신이 내린 결론들이다.

가치를, 유행을, 종교를, 직업을 내세워 뭔가를 할 때면 그에 해당하는 꼬리표가 자신의 정체성에 붙게 된다. 사람들은 넘치는 정보들로 머리가 터져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타인을 단순화시켜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은 구성원들에게 단순명료한 꼬리표를 제공한다.

문제는 이런 단순명료한 꼬리표일수록 바꾸기가 어려워진다는 데에 있다. 꼬리표를 바꾸는 것이 정체성 전체를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누군가에게 이 일은 더 골치 아픈 일이다. 더구나 맹목적 집단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들의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이것은 혼란을 야기하는 일인 동시에 머릿속 정보의 수정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들 집단의 단순명료한 정체성을 위협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변화는 배척, 조롱, 증오의 대상이 된다.

변화에 어려움을 느낄 수록, 현재 당신이 누구인지와 현재 당신이 무엇을 하고있는지에 집착하게 된다. 자신이 과학자인지 실험 그 자체인지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이 두 개가 사실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위에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실험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을 왜 반기는지 다루었다. 하지만 자신이 실험 그 자체인 경우 부정적 피드백은 새롭고 유용한 정보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공격 행위가 된다. 게다가 변화란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지기에, 부정적 피드백이 실질적으로 내게 해줄 수 있는 건 어차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이 실험이 여러 차례 실패할 것임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앞서 다루었다. 하지만 자신을 실험 그 자체에 동일시 하는 경우에서, 새로운 목표의 설정은 정체성의 변화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위기를 의미한다. 실험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를 의미한다. 실패작이 되어버린 나는 영원한 절망에 빠진다.

미국을 세운 건국의 조상들에 관해 엘론 머스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건국의 조상들이 제1원리부터 추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빈 서판”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에 스스로 얽매여 있”던 그 시기 유럽의 국가들은 미국처럼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엘론 머스크는 같은 말을 자동차 기업과 항공우주 기업들과 연관 지어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테슬라와 SpaceX를 18세기 말의 미국에 견주었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의 경우에는 “빈 서판”으로부터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항공우주 기업들을 언급하면서는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것에 대해 거대한 편견이 존재합니다. 다들 몸 사리기에만 급급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자신의 과거에 스스로 얽매여 있다는 것은 변화를 만들 방법을 모른다는 것, 혁신을 이끄는 방법을 잊었다는 것, 세상이 부여해준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앞서 언급했었던, 안전하게 여겨지는 선 안에서 성공 확률이 높아 보이는 실험만을 수행하는 암 연구자처럼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티브 잡스는 1986년 자신이 애플로부터 해고되었던 그 사건을 두고 “재앙의 모습으로 다가온 축복”이라 말했던 것이다. “애플에서 해고됐던 건 제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성공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은 사라졌고 초심자의 홀가분함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애 중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해고는 스티브 잡스를 자신의 과거로부터 해방시켜주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이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거다. “내가 지금 나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날개를 잘 준비해 두고도 절벽 위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정체성이 짐이 되어 도약을 못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의 두려움은, 통념이 곧 정답이라는 불안한 요리사들의 가정만큼이나 허황되다. 어디서나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른다”는 계시와는 달리, “실패나 변화나 모두 별 일 아니다”란 계시는 직접 경험해야지만 관측될 수 있다. 즉 공포를 극복해야지만 가능한 일인데, 이건 다시 말해 실패나 변화를 직접 겪고 이것들이 별일 아니라는 걸 실제로 느껴봐야 한다는 거다. 딜레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많은 능력자들이 자기혐오에 빠진 요리사들의 상태로 머물러있는 이유이다. 무엇이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것인가?

마지막 계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공포에 대한 경외를 버리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약화시킬 유일한 방법은 아무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내게 엄습해오던 공포가 결국 대부분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안전지대를 벗어나도 별일 없음을 확인하는 것은 엄청나게 강력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뇌에 새겨져 있던 불합리한 공포와 거기에 대한 경외는 조금씩 깎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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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들은 모르고 있지만 쉐프는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현실세계에서의 삶과 GTA가 사실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GTA가 재미있는 것은 두려움 없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가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GTA에선 도심을 시속 300km로 누비고 다니든 건물에 들이받든 보행자를 깔아 뭉게고 지나가든 상관없다.

GTA와는 달리 현실 세계엔 법도가 있고 깜빵도 있다. 이것이 GTA와 현실 세계의 차이의 전부이다. 여기 오늘날의 세상을 완벽히 구현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 게임의 룰은, 남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된다는 것, 위법 행위를 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당신과 가족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당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정말로 하고 싶었지만 감히 용기를 못 냈던 일들을 이 게임 속에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고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이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서는 살게 될 것이다. 자기정체성 혹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실은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셰프의 연구실에 초대되는 것이다. 안전지대 바깥의 영역을 누비고 다니며 삶은 날아오른다. 하지만 불합리한 공포가 우리를 이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위대한 셰프들은 자신의 삶을 GTL(Grand Theft Life)을 플레이 하듯 살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초능력의 원천이며,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게 마지막 계시의 비밀이 밝혀졌다: 대담무쌍, Fearlessness.


살면서 조금이라도 더 과학자처럼 사고하고 싶다면 이 세 가지를 기억하면 된다.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자만하지 말 것, 실현 가능한 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것, 중요치 않은 일에 대해선 두려움을 버릴 것.

좋은 플랜인데, 음 뭐랄까… 할게 정말 많아 보인다.

보통 이런 포스트들의 결론부에서는, 다뤄졌던 중요 포인트들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을 제시하곤 했었다. 근데 이 포스트에선 “자, 이것들이 참 중요하니 이제 잘 해봅시다.” 정도 밖에 말 못하겠다. 어쩌란 거냐고?

완벽한 셰프가 되려 해서는 안되고, 당신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려 해서는 더구나 안 된다는 데에 열쇠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완벽한 셰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론 역시 완벽한 셰프는 아니다. 그리고 세상엔 순전히 요리사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860억 개의 뉴런이 떠다니는 뇌를 가진 종으로서 흑과 백으로만 이뤄진 세상을 고집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셰프이고 어느 정도는 또 요리사이다. 우리가 셰프인 정도, 요리사인 정도는 삶의 국면과 하루하루의 기분과, 생애발달 과정에 따라 100가지도 넘는 방식으로 달라진다.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셰프에 가까워지고 싶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하드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추론이라는 것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연습할 수록 나아지는 하나의 스킬이라는 사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셰프와 요리사 간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블로그의 모든 포스트들은 결국 “왜요?” 놀이의 성인 버젼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잠깐, 근데 왜?(Wait but Why?)”는 참 잘 지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20대 시절의 앞뒤 없는 오만함을 벗어난 후에야 나는 ‘나’라는 소프트웨어가 근거 없는 확신과 맹목적 추정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것들을 해체하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이 블로그의 모든 포스트들이, 주제를 막론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적어도 내게 있어선 이 질문이야말로, 확신이 가져다 주는 취약한 안정감을 깨는 망치인 동시에, 보다 진실어리고 유용한 사유로의 길을 내도록 추동하는 출발점이다.

이 포스트를 쓰기 위해 엘론 머스크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나는 그가 그저 끝내주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도가 튼 달인인 동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라고 언제나 묻고 여기에 대한 진정한 답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이야기에서 큰 울림을 느낀 이유이자, 이번 연재에 이토록 긴 시간을 갖다 바친 이유이다.

그나저나 화성은, 언제쯤 가게 되려나?

엘런머스크는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하는가”의 11개의 생각

  1. 엘론 머스크가 어떤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지 궁금했었는데 이제 이해가 조금 가기 시작하네요. 긴 글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엘런 머스크를 기술했다고 볼 수는 없을 수 있어도 엘런 머스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이네요.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3. 좋은 글을 번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고 제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던 글이었습니다.

  4. 아 으리가 넘치네요 간만에 흥미로운 글 읽었습니다 김사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인공지능에대한 글이 생각이나네요

  5. 큰 울림을 주는 포스트였습니다. 평소 느낌으로만 존재하던 의문이나 불편함들을 개량화해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clear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6. 좋은 글 번역 감사합니다. 내용 처럼 엘론 머스크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더 좋은 인사이트를 얻는 글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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