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Bomb)과 자궁(Womb) 사이

영화 「오펜하이머」에는 뉴멕시코의 메마른 고원 위에 세워진 과학자 마을 로스앨러모스가 나온다. 1943년, 나라는 뛰어난 과학자들을 이 외딴 고원으로 불러 모았다. 그들은 담장 안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바깥에 말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 마을은 폭탄(bomb)을 낳았다. ‘낳았다’는 말은 그냥 하는 비유가 아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의 이름은 ‘리틀 보이’였다. 1952년 첫 수소폭탄 실험이 성공했을 때,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로스앨러모스의 동료들에게 보낸 전보는 세 단어였다. “아들입니다(It’s a boy).” 그들은 출산의 말로 죽음의 탄생을 알렸다.
Bomb에서 Tomb으로
폭탄은 무덤(tomb)을 남겼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만이 아니다. 미국이 1946년부터 1958년까지 수십 차례 핵실험을 한 태평양 마셜제도의 에네웨탁 환초에는, 실험에서 나온 방사성 잔해를 폭발 구덩이에 모아 콘크리트로 덮은 돔이 있다. 공식 이름은 루닛 돔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무덤(The Tomb)“이라 부른다.
과학자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생긴 일은 아니다. 질문은 있었다. 1945년 6월, 시카고의 과학자들은 프랑크 보고서를 써서 경고 없이 일본에 폭탄을 쓰는 데 반대했고, 7월에는 레오 실라르드와 동료 70여 명이 대통령 앞으로 청원서를 썼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결정을 바꾸지 못했다. 청원서를 로스앨러모스 안에서 돌리려던 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청원은 8월이 되어서야 전쟁부 장관 앞으로 넘어갔다. 문제는 질문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질문이 결정에 닿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뒤로 평생 그 무게를 짊어졌다.
오늘 사람들은 AI 개발을 두고 ‘새로운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말을 쉽게 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무엇을 낳을 것인가.
대학을 떠난 철학자, 그리고 호수의 수도원
같은 질문을 붙들고 있는 철학자가 있다. 독일 출신의 토비아스 리스(Tobias Rees). 버그루엔 연구소에서 ‘인간의 변형’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지금은 철학과 예술과 기술이 만나는 작은 연구소 리먼(limn)을 운영한다. 내 영문 에세이를 계기로 그와 글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는 AI가 유럽에게 “리히터 규모 11의 철학적 지진”이라고 말한다. 2,500년 동안 쌓아 온 인간, 이성, 의식 같은 개념들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AI 자체에는 의미가 없으니, 의미가 만들어지는 공간을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에마 인터뷰에서 그는 그런 공간의 본보기로 1919년의 바우하우스를 든다. 산업화 앞에서 예술가와 장인과 건축가가 한 학교에 모였던 곳이다.
같은 무렵,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조용한 반도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두 세기 동안 발데크 수녀회가 돌보며 그 지역의 첫 여학교를 세웠던 수도원 터에, 스텔라 마투티나라는 학교가 꾸려지고 있다. 철학, 예술, 과학, 비즈니스, 기술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배움의 장이다. 이곳은 스스로를 ‘철학적 R&D’의 자리라 부르는데, 리스가 오래 써 온 바로 그 말이다.
가장 새로운 질문을 담을 그릇으로 가장 오래된 형태를 고른 셈이다. 함께 살고, 함께 묻고, 같은 리듬으로 하루를 보내는 곳. 수녀들이 아이들을 품어 가르치던 자리가 이제 새 질문을 품는 자리가 된다. 담을 쌓은 실험실의 반대편이다.
Tomb에서 Womb으로: 하회
안동에는 이미 그런 그릇이 있다.
하회(河回)는 ‘강이 돌아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태극처럼 감싸 안고 흐른다. 물이 감싼 반도, 어머니의 품 같은 땅이다.
그 강가에 병산서원이 있다. 서원은 공부하는 곳이면서 제사를 모시는 곳이었고, 함께 먹고 자는 곳이었다. 강학(講學)과 제향(祭享)과 거처가 한 몸이었다. 호수의 수도원이 지금 찾고 있는 형태가 여기 4백 년째 서 있다.
그리고 하회에서 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는 옥연정사가 있다.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뒤 물러나 징비록(懲毖錄)을 쓴 곳이다. 이긴 전쟁의 기록이 아니라 무너진 나라의 기록이다. 수많은 무덤을 남긴 전쟁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보고, 그것을 뒷날을 지키는 지혜로 바꾸었다.
하회의 사당과 제사도 같은 일을 해 왔다. 떠난 이들을 무덤에 두고 잊지 않고, 이름을 불러 산 사람들 곁으로 데려왔다. 소설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회는 오래전부터 그렇다고 답해 온 마을이다. 무덤(tomb)을 품(womb)으로 바꾸어 온 마을이다.
안동의 과학자마을: 닮은 생김새, 반대의 방향
이제 안동 풍천면, 도청 신도시 곁에 K-과학자마을이 들어서고 있다. 경상북도가 짓고 건축가 승효상 등이 설계에 참여했으며, 주거 38동 45호와 공동시설 9동 규모로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다. 원자력과 에너지, 의료, 로봇, AI, 인문까지 각 분야의 과학자 아홉 분이 먼저 K-과학자로 활동하고 있고, 올해 열한 분 안팎을 더 뽑아 내년 상반기부터 마을에 함께 입주한다.
나라가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한 마을에 살게 했다는 점에서, 생김새는 로스앨러모스와 닮았다. 그래서 방향이 더욱 중요하다. 로스앨러모스가 담을 쌓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면, 안동의 과학자마을은 담을 열고 강과 마을을 향해야 한다. 로스앨러모스가 폭탄을 낳은 곳이었다면, 안동의 과학자마을은 새 문명을 품는 모태(womb)가 되어야 한다.
이 마을에 원자력 과학자들이 계시다는 것은 뜻깊다. 로스앨러모스가 남긴 유산의 빛과 그늘, 그리고 질문이 결정에 닿지 못했던 역사를 누구보다 깊이 아는 분들이다. 그 무게를 아는 사람이 다른 결말을 함께 쓸 때, 그 이야기는 가장 단단해진다. 징비는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서 가장 깊어진다.
아홉 분, 그리고 곧 함께할 열한 분은 저마다 깊은 전문성을 가지고 온다. 그 전문성은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아홉 개의 연구가 한곳에 모이는 것과 아홉 사람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는 것은 다르다. 마을은 입주 첫날의 리듬에서 시작된다. 함께 공부하는 날이 정해지고, 하회와 병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일상에 놓일 때, 이곳은 과학자들이 사는 단지를 넘어 하나의 마을이 된다.
모태가 되려면
처음부터 큰 사업을 벌일 필요는 없다. 첫걸음은 하나면 된다.
입주 첫 계절, 하회에서의 한 자리. 과학자마을에 입주한 분들과 하회·병산의 주민, 인문 분야 참여자가 강가에 한 번 모여, 이 마을이 함께 붙들 질문 하나를 정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실제 연구와 운영에 반영되는 길을 처음부터 열어 둔다. 로스앨러모스에 없었던 것이 바로 그 길이었다.
그 한 자리에서 이런 것들이 자라날 수 있다.
- 함께 공부하는 리듬: 과학자마을 강학회. 한 달에 한 번, 마을의 과학자들이 서로의 분야를 묻는 자리를 연다. 원자력 과학자가 의료 체계를 묻고, AI 연구자가 인문학자에게 묻는다. 병산서원의 강학처럼 정해진 날 정해진 자리에서 되풀이될 때, 아홉 개의 연구 사이에 공동체의 회로가 생긴다.
- 문을 여는 자리: 하회 글로벌 레지던시. 리스 같은 해외의 사상가, 예술가, 엔지니어가 몇 주씩 머물며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는 레지던시를 둔다. 스위스의 수도원 학교와 안동의 과학자마을이 서로 사람을 보내는 자매 관계도 그려 볼 수 있다.
- 기억을 담는 그릇: 지역 기억 아카이브. 안동에는 국학 자료와 수많은 어르신의 삶의 기억이 있다. 말하는 분의 동의와 쓰임의 범위를 먼저 약속하고, 그 약속 안에서 이것을 기록해 AI가 배울 수 있는 형태로 남기는 일을 과학자마을이 맡는다. 세계적 수학자 테렌스 타오는 AI 시대의 인간 사유를 다룬 논문을 쓴 뒤 나눈 대담에서, 지금의 AI가 성공의 기록으로만 배우고, 사람이 막히고 틀리고 다시 길을 찾는 과정은 배우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와 회복까지 기록하는 일, 징비록이 해 온 일이다.
- 질문을 세상에 내놓는 자리: 병산 AI 문명 포럼. 1년에 한 번, 병산서원에서 AI 이후의 문명을 묻는 포럼을 연다. 과학자마을의 과학자들과 해외 레지던트, 지역 주민이 한자리에 앉는다. 서울에서도 판교에서도 열 수 없는 대화를 안동에서 연다.
맺으며: Bomb, Tomb, Womb
서울은 AI 행정의 중심이 되고, 판교는 AI 산업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안동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안동이 AI 이후 문명의 질문을 맡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기술이 사람의 뜻에 맞게 움직이도록 하는 일을 AI 정렬(alignment)이라 부른다. 안동은 그 너머를 말할 수 있다. 기술의 정렬을 넘어 문명의 징비로. 미래는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열린다.
Bomb과 womb은 글자 하나 차이다. 하나는 터뜨려 무덤을 만들고, 하나는 품어서 생명을 낳는다. 로스앨러모스는 폭탄을 낳았고, 폭탄은 무덤을 남겼다. 하회는 수백 년 동안 무덤을 품으로 바꾸어 왔다.
이제 과학자마을이 그 품에 닿을 차례다.
참고
- A final interview with Edward Teller, American Heritage
- Runit Dome, Wikipedia
- Franck Report, Wikipedia
- Leo Szilard’s Fight to Stop the Bomb, Atomic Heritage Foundation
-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and the Use of the Atomic Bomb, American Diplomacy
- Artificial Intelligence and the 2500-year-old project called Europe,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소
- Why AI Is A Philosophical Rupture, Noema
- Tobias Rees, AI2050 Schmidt Sciences
- Stella Matutina
- 옥연정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Mathematical methods and human thought in the age of AI, Klowden & Tao, arXiv
- 경북도청신도시 2단계 ‘K-과학자마을’ 첫삽, 경북매일
- “은퇴·현직 석학들 경북으로” 경북도 K-과학자 공모, 국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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